도쿄 한복판의 어느 부동산 사무실. 정갈하게 갖춰 입은 사람들이 마주 앉아 있다. 화기애애한 공기 사이로 묘하게 긴장감이 흐른다. 큰돈이 오가는 계약이다 보니 당연한 듯싶지만, 조마조마한 이유는 따로 있다. 땅을 팔러 온 이들은 바로, 위조 서류와 가짜 주인을 내세워 돈을 가로채는 부동산 사기꾼들이기 때문이다.
팀으로 작업한 지도 오래됐다. 이젠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할 때인 걸까. 리더 해리슨은 마지막으로 그동안 접하지 않았던 규모를 도전하자고 제안한다. 이들의 미끼는 도심 내 오래된 사찰 부지. 천억 원대 매물을 누가 덤빌까 싶지만, 욕심의 틈은 어디에나 있는 법. 승진 문턱에서 위기를 맞은 세키요 하우스의 아오야기 부장이 덫에 걸려든다. 그렇게 해리슨 일당도, 아오야기 팀도 아슬아슬 탑을 쌓는다. 누가 뒤에서 언제 와장창 밀어버릴지 알지 못한 채.
# 사기꾼들의 진짜 그림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맹자의 사단설에서 나온 개념으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네 가지 본성 중 하나다. 맹자는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장면을 본다면 누구나 저절로 놀라고 안타까워하며 구하려 들 것이라 말한다. 그것이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측은지심이다.
이 마음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지탱하는 도덕적 뿌리로 여겨졌다. 공자의 인(仁) 사상과 맞닿아 있으며,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연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본능은 사기 피해자를 대할 때는 약해진다. 특히 투자 사기 피해자에게는 더 그렇다. 그들의 불행 속에서 부를 불리려는 욕망과 자본 논리에 편승한 흔적을 읽어내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 우리의 측은지심은 흔들린다. 탐욕이 화를 불렀다는 생각이 동정을 누르고, 냉소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런 시선은 드라마 <도쿄 사기꾼들>을 바라볼 때 더욱 선명해진다.
우선 드라마의 장르적 특성을 살펴보자.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관객들에게 이들이 벌이는 악행을 엿보게 한다. 작품 속에서나마 일탈을 즐기게 하는 어쩌면 관음적 길티플레저를 제공하는 셈이다. 언제 또 악인을 공식적으로 응원해보겠어. 따라서 범죄 오락물은 관객의 몰입을 위해 오롯이 범죄자 진영에 카메라를 머물게 한다. 의기투합부터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극복하고 마침내 목표를 이루는, 마치 스포츠 드라마의 쾌감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드라마 <도쿄 사기꾼들>은 전형적인 범죄 오락물과는 다른 독특한 지점을 가진다. 물론 흥미로운 오락적 요소도 존재하지만, 작품은 그보다는 사기 범죄가 가진 어두운 속성 그 자체를 더욱 부각하려 한다. 긴장감이 해소될 때 오는 통쾌함보다는 오히려 불편하고 찝찝한 현실감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해리슨 일당의 기지에 감탄하다가도, 조역들을 쓰고 버리는 모습에 그 환상이 바삭 깨진다. 절망에 빠진 피해자들이 안타깝지만, 스스로 귀 막고 달려간 당신 탓 아니냐며 손가락질하게 된다. 내가 믿어온 사회 정의의 기준이 모호해지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게 바로 사기꾼들이 퍼뜨린 진짜 사기려나.
# 맹목적인 동경은 위험해
원작 소설을 집필한 신조 고 작가에게 그런 생각의 전환을 만들어준 사건이 있었다. 바로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일본 최대 부동산 사기 사건, 일명 세키스이 부동산 사건이다. 그는 500억 원이라는 사기 금액보다, 누구나 다 아는 굴지의 부동산 회사가 그렇게 쉽게 당했다는 사실에 더욱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처럼 디지털이 발달한 사회에서, 굉장히 아날로그적인 수법으로 사기를 친다는 데 놀라움을 느꼈다. 왜 그들은 그렇게까지 해서 사람을 속이는가? 피해자들은 왜 속아 넘어가는가?"
소설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 사건을 바라보는 그의 심경을 엿볼 수 있다. 단순히 선과 악, 옳고 그름으로 해석하기보단, 대 사기의 시대가 버젓이 열리게 된 이면에 집중하려는 듯 보인다. 부동산 사기꾼들의 집념과 광기는 어디서부터 비롯한 걸까, 이 함정에 빠지는 우리는 무얼 바라보고 있는 걸까. 분명 제삼자의 눈에는 반드시 보일 거라는 믿음으로.
세키요 하우스와 계약이 진행되는 중간, 리더 해리슨은 팀의 핵심 멤버인 협상가 타쿠미를 불러서 위스키를 함께 마신다. 맛이 어떠냐고 묻는 해리슨에게, 맛있긴 하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타쿠미. 그러자 해리슨은 그 위스키의 숨은 역사를 알려준다.
Port ellen first 1979. 저렴한 브랜드로 명맥을 이어오다 결국 문을 닫게 되었는데, 갑자기 위스키 붐이 일면서 가격이 수직상승한 술이란다. 실제 기록을 찾아보니 1983년에 폐쇄할 당시 위스키 원액이 남았었는데, 2001년부터 한정 수량으로 발매하면서 브랜드 가치가 올라갔다고 한다. 이들이 마신 위스키는 그 첫 번째 에디션이었던 것.
“그 사람들 대부분 진짜 맛 같은 건 모를 거에요. 그 사람들은 도대체 무얼 사는 걸 까요”
한 병에 평균 4천 달러(약 5백 5십만 원)를 호가하는 초고가 위스키. 하지만 그 맛은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건 아닐 터다. 하지만 그 대열에 발맞추며 기호에 맞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그 맛을 한 번이라도 느껴보려고 영혼을 끌어 바치려는 사람들. 단지 비싼 돈을 들이는 것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어떤 이는 그만한 경험을 더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드라마는 누군가가 깔아놓은 판에 홀린 듯 달려가는 모습을 경계한다.
세키요 하우스의 아오야기 부장이 단적인 예다. 승진 경쟁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하자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샐러리맨. 그가 부동산 계약에 목숨을 거는 건 당연하다. 좋은 매물을 발견해서 투자 수익을 내야 하는 직업이니까. 하지만 계약을 놓칠까 봐 필사적으로 밀어붙이는 그의 절박한 표정을 보면, 단순히 직업적 소명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시즌 중반, 승진 라이벌인 스나가는 사기 가능성은 없는지 경고한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며 격분하는 아오야기. 돌아버린 그의 눈은 사회적 성공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객관성을 잃고 자신을 기만할 수 있는지 말해준다.
협상가 타쿠미도 마찬가지다. 그는 과거 사기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같은 사기 행각을 벌이는 가해자가 되었다. 지난날을 떨쳐내지 못하고 여전히 괴로워하지만, 냉철하고 묵직한 리더 해리슨을 보며 우러러보기도 한다.
“지면사(부동산 사기꾼)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는데, 지면사로 과거를 잊고 살아가게 되다니”
소설 마지막 즈음 등장하는 타쿠미의 독백은, 한탄도 자랑도 들어있지 않은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모습을 보여준다. 경험이 있으니 누군가에겐 상처일 건 알지만, 해리슨과 잡은 손은 나를 버티게 할 것이란 비뚤어진 믿음이다. 드라마 <도쿄 사기꾼들>은 이처럼 피해자의 욕심과 가해자의 합리화를 보여주며, 동경하는 마음이 망가뜨리는 정의의 경계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되묻는다. 우리는 그런 함정으로부터 자유로운지.
# 나를 이해하는 것부터
드라마는 리더 해리슨을 통해 우상화된 시각이 초래하는 위험을 확실하게 짚어준다. 시리즈 중반, 자신을 쫓는 타츠 형사를 납치하는 해리슨. 그리고는 가족을 볼모로 자살을 협박하며 공사 중인 건물 난간으로 그를 밀어붙인다. 이때 해리슨은 영화 <다이하드> 속의 테러범 한스 그루버를 언급하며, 가장 매력적인 악역이라며 경외심을 표한다. 그러고 보면 수트를 입고 경어를 쓰며 한스 그루버의 용모와 태도를 따라한 모습이다.
해리슨은 단순한 동경에 머무르지 않고, 한스 그루버 그 이상이 되려 한다. 한스가 떨어져 죽는 장면을 떠올리며, 타츠로부터 한스의 표정을 발견하려는 해리슨. 이는 영웅의 최후를 넘어, 심지어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자신만의 영웅담을 완성하려는 기괴한 집착이기도 하다.
이는 소설에 없는 장면으로, 감독은 해리슨과 <다이하드>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삽입함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지금 내가 무엇을 쫓고 있는지 돌아보길 바란 게 아니었을까. 동경의 대상에 대한 점검이 없다면, 언젠가 해리슨처럼 인간으로서의 선을 넘어서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동경하는 마음은 소중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세상에 길잡이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나. 그렇다면 무엇을 쫓아야 안전할까. 우상의 한자어는 짝 우(偶)에 형상 상(像)이다. 짝을 이루는 형상이라고 직역하려나. 조금 더 단어를 이해해보면, 아마도 내 안에 모호하게 차 있는 바라는 바를 형상화해, 짝을 이루는 것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터다. 즉 무언가를 동경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세팅해놓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란 말이겠지.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해석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내 발걸음에 방향도 정해질 일이다.
“이런 걸 조사할 때는 갖고 있는 단서부터 시작해야 해요. 관계없다고 생각했던 선들이 어느 틈에 연결되기도 하거든요”
타츠의 수사를 이어 나가는 쿠라모치 형사의 말은 단순한 수사 팁이 아니라, 우리 삶에도 그대로 겹친다. 결국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동경하는지에 대한 단서는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 출발하는 법. 드라마 <도쿄 사기꾼들>은 사기꾼들이 퍼뜨린 가짜 판에 홀려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건져 올린 작은 단서들을 한 땀 한 땀 붙여나가길 권한다. 그러다보면, 세상이 블랜딩한 최고급 위스키가 아닌 내 입맛에 딱 맞는 위스키가 무엇인지 알게 될 거라고.
그런 의미로 잊고 지냈던 성룡 아저씨의 해맑은 미소를 오랜만에 꺼내봐야겠다. 헤헤거리지 말라는 시대정신보단, 즐거운 얼굴을 닮고 싶었던 시절 속에 진짜 내 길이 담겨있을 테니까.
# 누군가는 영화 <다이하드>를 보고 악행에 근거로 삼지만, 누군가는 영웅의 마음을 쫓는다. 바로 미국 시트콤 <브루클린 나인나인>의 주인공 제이크 페랄타 형사다. 유쾌하지만 유치하고, 능글맞으면서도 철딱서니없는 캐릭터지만, 사건 앞에서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부재를 <다이하드> 속 존 맥클레인 형사로 채웠던 제이크. 아마도 그의 선함이 짝을 이뤄 쫓아갈 대상을 찾은게 아닐까.
같은 영화를 보아도 각자에게 남는 세상이 이토록 다르다. 아름다운 시각은, 아름다운 마음에서.
# 소설에서는 협상가 다쿠미와 법률전문가 고토가 세키요 하우스 사람들을 만나기 직전에 음악을 들으며 일부러 늦는다. 그것도 하나의 전략이라나. 다쿠미의 선곡은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제3번 라장조, BWV1068, 제2곡>. 이름만 들으면 무슨노랜지 전혀 모르겠다. 소설이라 어떤 음인지도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냥 뭐 있어보이는 음악을 들었나보다 했는데. 찾아보니 수없이 매체에서 들어왔던 <G선상의 아리아>로구만.
이름을 알게되니 괜히 품격이 높아진다. 귀에 익은 클래식 하나 있다고 내가 달라지는건 아닌데 말야. 비싼 위스키 한잔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마음이랑 비슷할까. 근데 또 뿌듯해하면 뭐 어때. 목매지만 않음 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