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 아무리 숨겨놓아도 그 향기만 잊지 않는다면

by 오달

미국 포틀랜드의 어느 숲속. 거구의 한 남자가 땅을 파헤치고 있다. 그가 들어 올린 건 굵직한 자연산 트러플(송로버섯) 한 송이. 만족한 표정으로 향을 맡고는, 이내 주머니 속 간식을 꺼내 곁에 있는 돼지에게 건넨다. 좋은 상품을 잘 찾아줘서 고맙다는 인사다. 똘똘하고 귀여운 생명체와 살 닿고 살아 그럴까. 세월이 묻어있는 그의 얼굴에 그래도 온기가 비친다.


‘트러플 헌터’ 로빈에게 고급 재료를 받아 판매하는 젊은 도매상 아미르. 업계 최고의 셰프였음에도 산속에 박혀있다니. 칩거하는 로빈이 의아하다. 그러던 어느 날, 속세와 절연한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돼지가 납치됐다고. 그의 분노가 예사롭지 않아 불안하지만, 추적 너머 절실함의 농도는 어째 단순하지 않다. 삭막한 도시를 관통해내는 상실의 여정이 애잔하다. 그 집념이 왠지 아미르의 코끝에도 슬쩍 닿는다. 깊은 곳에 숨어있던 트러플 향기가 되어.



# 숨는 건 도움이 되긴 하지만

어린 시절 다들 한 번씩 이런 경험이 있을까. 안방 장롱 안에 숨어, 곱게 개어놓은 이불에 몸을 맡긴 기억. 보드라우면서 차가운 감촉은 그 시절의 아로마였고, 사각의 어두운 공간은 나만의 아지트였다. 장롱 놀이를 마치고 나면 왠지 한층 성장한 기분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고 오롯이 내 숨결에 의지했던 경험이니까.


사회인이 되고 나면 매일이 숨바꼭질이다. 불편한 감정은 묻어놓고, 어떤 기억은 굳이 꺼내지 않는다. 개입을 덜어내고 공간을 줄여 변수를 차단한다. 너무 꽁꽁 싸매는 건가 싶은데, 생각보다 괜찮다. 오히려 안정감을 느낀다. 태초의 자가격리였던 장롱 속 기억이 되살아나는군. 그래 이만한 안식처가 또 어디 있겠어.



영화 <피그>의 로빈은 좀 더 적극적으로 몸을 숨긴다. 숲속 깊은 곳, 사람의 흔적이 거의 닿지 않는 공간에서 홀로 지내는 로빈. 필요한 만큼만 움직이고, 관계를 늘리지 않는다. 잘 훈련된 트러플 돼지와 함께 근사한 재료를 찾고, 특기인 요리를 소박하게 해 먹으면 그만이다. 이러니 핸드폰 같은 도시 생필품에 관심이 있을 리 만무하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평온의 영역. 이래서 자연인 아저씨들이 그렇게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걸까.


하지만 복잡한 세상과의 절연이 전부가 아닌가 보다. 자신만의 아늑한 성이라면 거슬릴 걸음은 죄다 치웠을 텐데, 아직 어색한 몸짓이 남아있다. 책상 위에 놓인 카세트테이프를 바라보다 슬며시 재생하는 로빈.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고, 금방 전원을 꺼버린다. 종일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으며 하루의 리듬을 유지했지만, 단 하나의 문턱 앞에서 발이 멈춘다. 철저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안전가옥인 줄 알았는데. 관계로부터 멀어지고 시간을 밀어놓더라도, 끝까지 비집고 들어오는 뭔가가 있다. 저 마음속 깊이 가둬 놓은 오래된 향기가.



# 다시 찾는 마음이 어려운 건

영화 <피그>의 소재로 사용된 트러플이 바로 그 모양새다. 나무뿌리에 붙어 흙 속에서 자라는 특이한 버섯, 트러플. 지상에 눈에 띄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발견하기도 어렵다. 인공 재배도 시도했지만, 번식 패턴을 찾지 못해 농장 운영도 대개 실패한다고 한다.


그래서 채집을 위해 트러플 돼지를 활용한다. 트러플을 먹여 길들인 돼지는 깊은 곳에 묻혀있는 트러플 고유의 냄새를 찾아낸다. 풍미 덕에 최고급 식재료 반열에 올랐는데, 그게 발목을 잡다니. 트러플 입장에선 아이러니하다. 어쩔 수 없는 성질이 나를 흔든다면 별수 있나. 땅속으로 더더욱 파고들어야겠지. 최대한 발각되지 않는 전략. 이것이 트러플의 생존방식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진짜를 감추고 싶을 때가 있다. 솔직한 게 언제나 최선은 아니기도 하니까. 보호하고 싶은 감정이 무엇이든, 안전하게 보관해 놓으면 일상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저 전면에 드러나지 않도록 감추거나 시선을 옮길 뿐이다. 근처에 숨을 곳이 없다면 여긴 장롱이다 하고 자기 최면을 걸어 보기도 할 테지. 그 정돈 괜찮잖아.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있겠지만, 크게 문제는 없으니까. 근데 정말 그럴까.



“이것(요리)들은 진짜가 아니야, 당신도 그걸 알고 있지. 평론가도 진짜가 아니야. 고객도 진짜가 아니야. 왜냐면 이것부터 진짜가 아니니까. 자네도 진짜가 아니고.”

- 영화 <피그>


로빈의 추적 속에서 만나는 인물들도 비슷한 경계에 서 있다. 납치 세력으로부터 트러플을 받을 예정인 주방장 데릭. 그의 꿈은 영국식 펍을 차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원했던 건 아니었을 거라며, 현재의 레스토랑이 자신의 인생이라 말한다. 하지만 본인도 알고 있다. 재료를 해체하고 친숙한 것을 낯설게 한다는 신메뉴 설명이 얼마나 해괴한지. 수습 직원 때부터 생각해온 대표메뉴가 머릿속에 얼마나 선명한지.


납치를 사주한 도매상 다리우스도 마찬가지다. 빈틈없이 강했던 그는 아내를 잃고 제대로 슬퍼하지 못했다. 오히려 모든 것을 통제하고 폭력적으로 사업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슬픔이 들어올 여유를 없애는 것만이 그를 지탱하게 했다. 결국 업계 최고의 강자로 군림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혼자 겁을 내고 있었으리라. 겹겹이 가려놔도 언젠간 아픔을 마주할 날이 왔을 테니까.


도시를 들쑤시는 로빈은 온전할까. 극복이란 이름으로 돼지와 함께 살아가지만, 그 관계는 왠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아내와 레스토랑 파트너로서 호흡을 맞췄던 기억은, 오늘날 숲속을 넘나드는 트러플 채취와 겹친다. 애정을 쏟을 대상을 옮겼다는 것만으로 충분하길 기대했겠지. 그러나 테이프 한 소절을 넘어가지 못하는 순간, 느끼지 않았을까. 사실은 애도의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했단 걸.



생각해보면 정교하게 조직된 유사품은 진위를 판별하기 쉽지 않다. 트러플을 흉내 낸 오일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저녁이 될 수 있단 말이지. 하지만 이들은 어쩐 일인지 부족한 향기를 느낀다. 아마도 그건 골방에서 꿈을 그렸던 패기의 향이고, 잊을 수 없는 식사에 미소짓던 행복의 향이며, 서툴게 서프라이즈 노래를 불러주던 사랑의 향일 테다.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런.


모자란 맛을 굳이 모른 척하고 입에 들이미는 시도를 이해한다. 소중했던 만큼 이별은 고통이었고, 다시 찾아 나서기엔 두려움이 덜컥 앞섰을 테다. 그런데 어쩌나. 비슷한 것들로 기워낸 삶 사이로 가끔 실밥이 풀리는걸. 애써 외면했던 저 아래의 잔향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두드린다. 인간이 찾을 수 없게 깊은 곳에서 자라더라도, 결국엔 지면을 비집고 올라오는 트러플 내음처럼.



# 트러플이 진짜 귀한 이유

진짜를 바라보란 말은 어쩌면 후벼 파는 일이다. 묻어놓은 각자의 사정이 있을 테니까. 가슴 속 보물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면 야속하단 말이 왜 있겠는가. 소중한 것은 쉬이 내 손에 올라오지 않는단 말이지. 외면하고 격리하면서 평온함을 유지한다면, 그 역시 나를 지키는 최대한의 방법인 셈이다. 영화는 그런 가혹한 현실을 인정이라도 하는 듯, 그저 모두를 조용히 불러 모으기로 한다. 복수도 분노도 비난도 없는 다정한 식탁으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으려면, 내면을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서로를 연결하는 공통점이 분명히 있고, 그것이 삶의 핵심이라고 느꼈거든요. 때로는 그 핵심이 슬프고 어두운 데서 나오기도 해요. 그래도 그걸 외면하지 않고 제대로 마주해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 인터뷰


돼지를 돌려받기 위해 다리우스를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당했던 로빈. 울분이 더 치솟을 법도 한데, 반대로 마음을 추스르고 차분해진다. 잠깐의 대화 속에서 같은 아픔을 발견했던 걸까. 도리어 자신의 모습이 비쳤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로빈은 위로의 식사를 준비한다. 각자의 숲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던 족쇄를 함께 벗어던지기 위해.



한 번 귀하게 느꼈던 것을 지금도 최고라며 여전히 전시할 필요는 없다. 수만 개의 잠금장치를 달고 바다 한가운데 빠뜨려도 좋다. 다신 돌아보지 않아도 상관없다. 살아가는 건 오늘의 나고, 현재의 안전이 먼저니까. 다만 영화는 그 소중한 기억을 없던 일로는 만들지 말자며 다독인다. 마음껏 울고 스스럼없이 힐난하며 제대로 아파하길 바란다. 내게 전부였던 그 시절이 너무 초라하지 않도록.


“유사 향료가 워낙 흔하게 쓰이다 보니, 많은 사람이 트러플 향이 다 비슷하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트러플은 저마다 고유한 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 리처드 스프리발로 박사, 독일 괴테 대학교 트러플 전문가


자료를 조사하며 알게 된 리처드 박사. 20년 가까이 트러플을 연구해 온 그는, 유사 향료가 실제 트러플을 따라갈 수 없는 중요한 요건으로 고유한 향을 꼽는다. 물론 같은 종의 경향이란 건 존재하겠지만, 개체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기에 더욱 귀하다는 이야기다.


박사가 전해준 정보를 비추니, 영화가 말하는 트러플 헌팅이 새로 보인다. 발견하기 힘든 것만으로, 몸값이 결정되는 게 아닌 거다. 자신도 모르게 내뿜고 있는 각자의 내음이 이미 그 가치를 증명한단다. 그저 탄생했다고 풍미가 완성되는 건 아니겠지. 인생의 모든 순간이 모여 나만의 향기 세포를 틔웠으리라. 슬퍼했던 시간까지 모두 포함해서.


어쩌면 애타게 찾을 것도, 애지중지 숨겨놓을 것도 아니었나 싶다. 한없이 사랑했고, 끊임없이 미안하며, 찬란한 꿈을 꾸었던. 그래서 언제나 고유한 향을 품고 있는, 내가 분명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트러플은 비싸니까 오늘은 팽이버섯이나 볶아먹어야지.











# 영화의 마지막은 로빈이 듣기를 주저했던 아내의 노래가 장식한다. 테이프 너머로 들리는 나지막하면서 다정한 목소리. 영화에 등장한 모든 이들과 그걸 바라본 관객들 모두를 어루만져준다. 어떤 노래인지 검색을 해보니 살짝 혼란스럽다. 가사가 정욕으로 가득차있잖아?


난 지금 불타고 있다고 되뇌이며 이 욕망을 식혀줄 사람은 당신뿐이라는 아찔한 고백. 미국의 락스타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1984년 곡 <I am on fire>다. 불같은 내용의 이 노래는 포크가수 카산드라 바이올렛에 의해 어쿠스틱 버전으로 리메이크됐는데, 영화는 어째서 이 노래를 고른걸까.


그녀의 음성을 천천히 더 들어본다. 내지르지도 애절하지도 않은 담담한 선율. 어느 누가 자신이 불타고 있다고 이렇게 담담하게 이야기할까. 이 괴로움은 왠지 당장의 감정이 아닌것만 같다. 오랜시간 자신을 건드려온 저 밑바닥의 불씨를 가리키는가 싶다.


누구나 욕망이 있고 이면이 있다. 슬픔과 아픔도 가득하다. 하지만 드러내는 건 수치스럽고, 인정하기엔 근간이 흔들린다. 영화는 계속 말했다. 숨겨도 결국 그 잔향은 피어난다고. 그래서 한가지 방법을 제안하는게 아닐까. 가끔 조용히 혼자 나지막이 진짜 나의 마음을 불러보기를. 나는 지금 불타고 있다. 그게 나다.


https://youtu.be/SDGEq1kg8v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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