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대학생 노리코. 그녀는 특별한 목표도 삶의 방향도 정하지 못한 채 흘러가는 중이다. 똑 부러지는 사촌 미치코를 보고 있자니 왠지 뒤처진 인생처럼 느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권유로 동네 다케다 아줌마에게 다도 수업을 받기 시작한 그녀. 무언가에 집중하면 생각이 정리될 줄만 알았는데, 꼼꼼한 규칙과 낯선 절차, 그리고 수없이 반복되는 다도의 과정은 오히려 혼란스럽기만 하다. 나는 아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하나하나 머리로 이해하려는 그녀에게, 괜찮으니 천천히 따라오라는 선생님. 의심을 거두고 기본에 충실하다 보니 노리코의 손은 조금씩 자연스러워진다. 물 끓는 소리와 공기의 냄새가 그녀의 감각에 닿는다. 올곧아 보이기만 했던 전통 예법은 어느새 노리코가 삶을 대하는 방식으로 변해간다. 어떤 계절에도 오롯이 날씨를 만끽하며 세포를 키워내는 찻잎처럼. 오늘 하루를 그저 사랑하는 것으로.
# 기본기의 목적은 알지만
한때 이런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대학 졸업과 취업 준비에 일정 수준의 토익점수가 왜 필요한 것인가. 영어 실력을 평가한다는 취지엔 동감하지만, 정작 문제 풀이는 패턴에 따른 암기력 검증에 불과하지 않은가. 궁둥이 붙이고 앉아있다고 다가 아니다. 기본이란 이름 아래 답을 찾는 기술만 반복하는걸. 금세 휘발될 테스트에 대체 무슨 변별력이 있는 걸까.
작심삼일이 백번이면 1년이 된다며, 도전을 응원하는 목소리도 거슬린다. 시도에만 의의를 두는 정신승리 아닌가. 있던 자리에 다시 돌아와 서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물론 예상된 실패를 맞이하는 게 더 안전하다는 입장도 있을 테다. 가본 적 없는 대안에 덤벼들긴 두려우니까. 그래도 언제까지 준비운동을 거듭할 셈인가. 분명 밥그릇을 몇 개나 더 비웠는데.
영화 <일일시호일>의 노리코도 비슷한 조급함을 느낀다. 취업 준비에 한창인 친구들과 달리, 하고 싶은 게 뭔지 알 수 없는 그녀. ‘노력파’라는 수식어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던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었을 텐데, 오히려 성과 부족의 다른 말인 것만 같다. 게다가 사촌 미치코는 목소리며 눈빛이며 어쩜 그리 야무진 건지. 견주다 보면 눈앞의 인생을 이해할 길이 없다. 당최 납득이 안 되던 어린 시절의 그 영화처럼.
“이상하다고 생각되겠지만, 다도란 그런 거예요”
- 영화 <일일시호일>
우연히 시작한 다도 수업. 삶의 힌트를 발견할까 기대했는데, 복잡한 절차에 오히려 좌절의 연속이다. 찻수건을 접는 방식부터 찻잔을 닦는 법, 차를 우리고 대접하는 모든 과정이 엄격하다. 관습과 형식은 자유로움을 가둔다며 응석을 부려도, 선생님은 감각으로 익힐 것을 강조한다. 기본기의 목적은 알지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한마디가 있다. 그래서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하나.
# 반복의 핵심은 들였던 시간 속에
시장경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대사회. 살아남기 위해서는 효율성을 놓쳐선 안 된다. 손실의 틈이 보이면 가차 없다. 핵심은 간단해야 하고, 결론은 빨라야 한다. 가끔은 적당하단 이유로 기초훈련을 뛰어넘기도 한다. 그렇게 비축한 에너지야말로 무한 경쟁의 근간이 되므로.
하지만 다도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뜨끈한 차 한잔 내 오면 그만인데, 세세한 규칙과 불편한 자세를 권장하며 비효율의 끝을 보여준다. 오늘의 기본기가 무슨 효과를 불러오는지 알 길도 없다. 그저 배우기보단 익숙해지길 요청한다. 생각을 비우고 손을 믿으라고 다독인다. 목표와 기대, 성취감 없이 우직하게 걷는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잖나. 여유도 정도껏 부리란 말이 차오른다. 답답한 예법을 통해, 영화는 무얼 전하려는 걸까.
“세상에는 금방 알 수 있는 것과 쉽게 알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쉽게 알 수 없는 것들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알아가야 하죠. 그런 태도가 지금 시대에는 많이 잊혀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 오모리 다츠시 감독 인터뷰
바쁜 사회에 적응하느라 놓치는 것들을 안타까워한 감독. 이에 영화 <일일시호일>은 느림과 반복에 끊임없이 집중한다. 마음을 담기 전에 형태를 잡으라는 모호한 대답을 곁들이며, 굳이 이해를 떠먹여 주지도 않는다. 오로지 관객이 다도의 속도에 발맞춰 따라와 주길 바란다. 그렇게 반복의 아리송함이 옅어지는 순간, 분절된 듯 보였던 행동들은 어느덧 하나의 리듬이 된다. 그리고 가려졌던 감각을 깨우기 시작한다.
낯설었던 선생님의 몸짓에서 부드러움을 발견하고, 산뜻함과 개운함을 느낀다. 알 수 없게 휘갈겨 쓴 족자의 글귀는 폭포 소리가 되어 가슴에 스민다. 손이 저절로 물통을 붙잡고, 알맞은 정도의 찻물을 담는 자신을 발견한 노리코. 그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나아진 것 없는 쳇바퀴인 줄만 알았는데, 한참이나 달릴 근육이 붙어있다. 그제야 지나간 절기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꾸준히 시간을 들였구나.
“어릴 때 <길>이라는 영화를 봤어. 그때는 전혀 이해가 안 됐어. 그런데 저번에 한 번 더 봤더니 굉장한 영화였어. 이 영화에 감동하지 않으면 인생이 낭비될 만큼”
- 영화 <일일시호일>
지난날을 추억하는 노리코의 대사도, 시간이 우리를 성장케 함을 짚는다. 그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 것도 아니다. 오직 하루하루 쌓인 그녀의 인생이 깊이를 열어준 셈이다.
하지만 단순히 세월을 보내는 것만으로 삶의 매듭이 풀리는 건 아닐 테다. 미치코가 여행을 가서 혼자 수업받아야 해도, 가족 일정으로 오늘은 왠지 쉬고 싶어도, 재능 있는 후배에 기가 죽어도, 오늘의 찻잔을 붙잡는 성실함이 그녀를 이끈 게 분명하다.
“다도 교실에 다닌다 해도, 처음에는 다리만 저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느낄지도 몰라요. 하지만 분명 언젠가는 ‘계속 배워오길 잘했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수업의 시간을 하나하나 쌓아간다는 건, 결국 자기 안에 풍요로운 무언가를 쌓아가는 일 아닐까요.”
- 모리시타 노리코 작가 인터뷰, 영화 <일일시호일> 원작자
다도는 어차피 어렵다. 다케다 선생님도 부족하다며 여전히 배우고 있단다. 실수하고 덤벙대는 건 당연하다. 대신 서툴러도 좋으니, 오늘의 다회를 온전히 경험하길 권한다. 너그러우면서도 단호한 가르침. 그 속엔 삶의 형태를 단단히 만들어 가려는 태도가 묻어있다. 천천히 쌓아 올린 시간은 그렇게 인생의 거름이 된다. ‘계속 살아오길 잘했구나’ 하고 생각이 들 만큼.
# 결코 똑같을 수 없으니
긴 여정과 반복된 수련이 오늘의 나를 만든다는 교훈. 너무나 와닿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조언이다. ‘매일매일 좋은 날’이란 뜻의 제목 <일일시호일>도 왠지 좌절이 회복되고 나서야 생각날 다짐이다. 단순히 좋은 게 좋은 거란 슬로건만으로 호흡을 길게 머물도록 할 수 있을까.
이런 불안한 의지를 아는 듯, 영화 후반 무렵 다케다 선생님은 차 대접 실습에 앞서 수강생들에게 다도의 깊은 철학을 전한다. 일본 다도 문화의 근본이 되는 마음가짐, ‘일기일회(一期一会, いちごいちえ)’. 설령 같은 사람들과, 같은 장소에서 다회를 연다 해도 결코 똑같이 반복될 수 없다. 그러니 생애에 단 한 번뿐인 자리라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라는 가르침이다.
아무리 루틴을 만들고 같은 하루를 유지하려 해도, 그날의 날씨, 계절, 감정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숨 가쁜 세상에 휩쓸리지 않으려 살아내느라 찰나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 우리는 매번 다른 고유한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 영화가 우리의 인생에 시간을 들여 주의를 기울이기를 끊임없이 권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까.
“비가 오는 날엔 빗소리를 듣는다. 오감을 동원해 온몸으로 그 순간을 맛본다. 눈 오는 날엔 눈을 보고, 여름에는 찌는 더위를,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를. ‘매일이 좋은 날’이란 건 그런 뜻이던가”
- 영화 <일일시호일>
노리코는 문득 다기에 떨어지는 더운물과 찬물의 소리 차이를 발견한다. 여름비와 가을비가 닿는 기분을 구별한다. 벽에 걸린 족자와 계절의 풍경이 달라지는 걸 바라볼 여유가 생긴다. 성실하게 반복했던 그녀의 태도는 복잡한 형식을 담는 기초가 됐고, 그 골격 위에서 순간을 만끽할 여백이 펼쳐졌다. 어쩌면 ‘일일시호일’은 소회나 다짐이 아닌, 나에 대한 선언이지 않을까 싶다. 단 한 번뿐인 하루를 꾸준히 사랑하게 하는.
효율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작심삼일이 89번 차인 내가 있고, 이유는 몰라도 엉덩이로 인내한 내가 있다. 성과의 측면에선 여전히 연비가 떨어진다. 그렇지만 어쨌든 매일이 희소하고 그날만의 아름다움을 언제든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행복의 효율은 비교할 수가 없겠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오늘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쌓이고 있을 테니까. 그런 이유로 오늘은, 작심삼일 90번 차를 시작해보겠어.
# 영화는 계절의 변화를 절기에 따라 세세하게 담는다. 소리와 영상을 조용히 건네며, 관객이 그날의 날씨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절기마다 변하는 환경만큼이나 알게모르게 꾸준히 달라지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벽에 붙어있는 족자다. 한문인건 둘째치고 캘리그라피마냥 흘려쓴 서체라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지만, 시절에 따라 바뀌는 풍경처럼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족자는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日日是好日' 이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카니시 리리코 양이 키키 키린(다케다 선생님 역)의 추천을 받아서 썼다고 한다. 인생엔 여러 가지 ‘날’이 있다는 걸 전하고 싶었기 때문에, 같은 ‘日’자가 세 번 반복되지 않도록 일부러 다르게 썼다는 리리코 양. 다시 보니 정말 그렇다. 급훈처럼 조용히 다실을 안아주는 것 같았는데, 하나하나 주의를 기울인 작가의 마음이 전해졌었나 보다. 정말이지 감동은 곳곳에 있다. 매일 지나치는 순간 속에서, 우리의 감각을 세심하게 열어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