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낙엽을 타고] 다정함의 생존력은 생각보다 더

by 오달

어느 한 여성이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레토르트와 단출한 테이블이 전부인 그녀의 공간. 쓸쓸함조차도 외로워서 도망간 걸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웃 나라 폭격 소식에 놀랄 만도 한데, 동요하는 모습이 전혀 없다. 공사 현장의 한 남성 역시 놀라울 정도로 낮은 반응으로 살아간다. 그나마 나눠보는 동료와의 대화는 냉소로 가득하고, 표정 없이 마시는 술만이 그의 동반자인가 싶다. 도대체 이 공간에 감정이란 게 있는 걸까.

이런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눈길을 주고받는다. 표현의 폭은 여전히 희미하지만, 고독인들 마음속에 무엇이 건드려졌는지 전에 없던 적극성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고 영화관 데이트까지. 삶에 활기가 비로소 찾아오나 했는데, 그녀가 남긴 전화번호 쪽지를 잃어버리는 남자. 그러나 싸늘하기만 한 세상에 한 줌 타올랐던 온기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 법. 엇갈린 운명은 내내 차가웠던 두 마음에 손을 잡아 준다. 바닥에 가득한 낙엽과 함께.



# 무감각의 기술

TV에서 한동안 멎었던 포격 소리가 들려온다. 애도를 자아내는 소식에 눈이 번쩍 뜨였다. 어디선가 곪았던 게 또 터졌구나. 아픈 현실에 먹먹해진다. 생각해보면 탄약 냄새는 멈춘 적이 없었을 텐데, 이제야 눈길이 머물다니 머쓱하다. 그런 미안함에도 금세 시선이 내게로 돌아온다. 어쩌겠나. 바다 건너 이야기엔 관심의 유효기간이 짧은걸. 그렇게 변명을 해 본다.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속 두 남녀 역시 외부 자극에 냉혹할 정도로 무신경하다. 사상자 속보가 매일 흘러나올 정도로 불안한 지금인데, 라디오 전원을 뽑게 만든 건 그녀가 실직 후 받은 전기세 고지서다. 회사 기숙사에 누워있는 남자도 마찬가지. 전쟁 뉴스는 그저 일과 후 몸 단장할 때 틀어놓는 배경음에 불과하다.



이들뿐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모두가 그렇다. 오가는 일터에서도, 퇴근하는 버스에서도, 심지어 바에서 열창하는 노래를 들으면서도 감정의 진폭은 드러나지 않는다. 단순히 국가적 이슈만이 아닌, 일상 전체에 무뎌진 사람들. 자칫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법한데, 오히려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진다. 이거 단순한 무감각이 아닐지 몰라.


“핀란드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예요. 세상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바로 그런 이야기죠.”

- 포이스티 바타넨(안사 역) 인터뷰


시장 경제의 냉정함과 현대 사회의 고립감. 영화 속 두 주인공을 넘어 우리의 모습이 스친다. 포탄 소리에 신경 쓰고 흥분하기엔, 이미 매일 아침 출근길부터 전쟁인걸. 눈빛에 마음을 품지 않음은, 잔인함이 아니라 자기 보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정장치인 셈이다. 더 이상 슬퍼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더 슬퍼하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것

이처럼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인류의 속성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 영화는 이야기 중반 책 한 권을 소개한다. 바로 핀란드 작가 마르코 타피오의 연작소설 <북극 히스테리>다. 북극과 가까운 문화권에서 발생하는 증후군, ‘북극 히스테리’. 장기간 해가 뜨지 않는 극야(極夜, Polar night) 현상이 사람들에게 정서적 어둠을 가져온다는 연구 이론이다.


마르코 타피오는 이 증상을 바탕으로, 겨울 전쟁과 계속 전쟁(2차 세계대전 당시, 핀란드와 소련이 벌였던 전쟁)을 거치며 핀란드 사회에 축적된 침묵과 불안에 주목했다. 한 인간을, 나아가 한 집단을 심연의 광기로 몰아붙인 극한의 환경과 끝없는 폭력. 그 시각은 오늘날 우크라이나 침공을 바라보는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시선으로 이어진다. 소설 <북극 히스테리>의 중심 화자는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인 관찰자로 그려지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활기를 띠지 않는 영화 속 인물들이 딱 그 모양새이지 않은가.



소설 집필로부터 60년 가까이 지나도록 문화적 특수성이 유효한 지점도 눈길이 간다. 핀란드의 근현대사와 자연현상은 지울 수도 잊을 수도 없는, 그 공간을 이루는 유산이기 때문이려나.


핀란드어로 ‘갇힌’이란 뜻인 여자 주인공 이름 ‘안사’에는, 잔혹한 역사에 뼛속 깊이 각인된 시대정신이 비친다. 남자의 고질적인 음주 문제는, 어느 집을 노크해도 발견할 수 있는 세대의 질환이기도 하다. 이처럼 오늘날 다시 돌아온 역사의 극야현상은, 은퇴를 선언한 노년의 감독에게 메가폰을 다시 쥐여주었다. “참혹한 전쟁을 언급하지 않고, 현재를 바라볼 순 없었다”라는 소회와 함께.


어둠에 적응해 숨죽이고 살아온 세상. 무기력해 보여도 그 역시 시대를 버티게 한 전략이었음은 인정한다. 솟아날 구멍 없는 장기적인 비극에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마르코 타피오 작가처럼 씁쓸함을 직면해야, 전쟁 같은 오늘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터다. 하지만 그렇게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어딜 바라보는지 모를 동공만이 유일한 생존전략이라기엔 너무 서글프단 말이지.



“피로 물든 세계에 이젠 사랑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인터뷰


이에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단지 인간의 무기력한 생존법에만 집중하진 않는다. <북극 히스테리> 방식으로 헬싱키의 지금을 진단하면서도, 문화 인류학으로 재단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죽게 생긴 유기견을 집으로 데려와 쓰다듬는 순간, 살짝이 입가에 드러났던 그녀의 미소. 해고를 당하더라도 술을 놓지 않던 알코올중독 남자가, 그녀를 떠올리며 개수대에 몽땅 쏟아버리던 모습. 그렇게 영화는 찰나의 따뜻함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생존을 위해 가슴 깊이 밀어놓았을지언정, 여느 커플만큼이나 풋풋한 첫 만남. 연락처를 잃어버린 뒤 영화관을 수없이 서성이고 하릴없이 전화기를 바라보는 모습엔, 극야에 파묻힌 좌절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뻣뻣한 시선과 절제된 표현투성이지만, 이쯤 되면 살아온 관성일 거라 끄덕여본다. 조금씩 쌓여가는 애틋함은 마침내, 그녀가 라디오를 끄며 세상에 한소리를 외칠 기운마저 불어넣는다. 피로 물든 세계에 사랑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 서로가 태양이 되어준다면

방황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듯, 지속된 불안 속에서 따스함을 집어내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주인공들이 관람했던 영화 속 좀비들처럼,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상태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거든. 하지만 다정함의 생존력을 바라본 감독의 입장을 미루어볼 때, 그래도 어둠의 굴레를 벗어날 열쇠가 분명 있지 않을까.


다시 <북극 히스테리>로 돌아가 보자. 이 증후군은 환경, 영양, 문화적인 스트레스가 겹쳐서 나타나는 복합적 반응이란다. 따라서 한 가지 처방으로 모든 증상을 완화할 순 없겠지만, 그중에 눈에 띄는 분석이 있다. 바로 비타민D 부족. 비타민D는 행복 호르몬으로 불리는 ‘세로토닌’을 생성하고 조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오랜 기간 햇빛을 보지 못하면, 체내에서 합성이 되지 않아 결핍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어두운 시기와 우울감의 철학적 상관관계는 잠시 접어두고, 생리학적 메시지에 집중하니 의외로 해결책이 쉽게 보인다. 바로 햇빛 섭취하기. 툭툭 털고 집 밖을 나가서 햇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부족했던 내 안의 활기가 시동을 걸 거란 진단이다. 식품이나 영양제 섭취로도 가능하지만, 전문가들은 일광욕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 말한다. 그것이 우리 생태에 가장 자연스러우니까. 마치 서로의 다정함에 어느새 반응하고 있는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강제로 태양이 차단된 인생이라며 고개를 저을 사람도 있겠지. 그럼에도 영화는 건조한 인생 속 작은 틈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놀라지도 웃지도 않으며 영화관 데이트를 마친 주인공들을 보자. 철벽같은 무표정에 무슨 감정이나 오갔을까 의뭉스러운데, “처음으로 실컷 웃었다”라며 다음 만남을 기대하는 두 사람. 자신들처럼 맥없는 좀비를 보는 게 뭐가 그리 재밌었겠냐 만은, 같은 마음으로 스크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 신경계가 활성화됐으리라. 덕분에 알아차렸으려나. 생명을 다했다고 생각했던 좀비가, 사실은 끊임없이 살아내는 중이었단 걸. 내 안에 여전한 다정함처럼.


영화는 두 주인공이 함께 잎이 떨어진 산책길을 걸으며 끝난다. 다시 찾아올 극야의 겨울이 떠오르면서도, 왠지 걸음엔 편안함이 묻어있다. 햇빛을 품고 떨어진 수많은 잎새가 결국 다음 해의 밑거름이 되는 것처럼, 서로에게 닿은 사소한 따뜻함은 내일을 살아갈 에너지가 될 터다. 그러니 오늘의 전쟁에 하늘이 희뿌옇더라도 가끔은 산책을 나설 필요가 있겠다. 햇살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온기를 나눠주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내 안의 다정함도 함께 나눠보기로. 인간 비타민이 뭐 별거냐.









#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삭막한 도시의 모습 위로 끊임없이 음악을 들려준다. 라디오에서도, 바에서도, 옆방에서 누군가 노래연습하는 소리까지. 건조한 세상을 그렸지만 조금만 귀기울이면 우리 곁엔 언제든지 선율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대부분 핀란드 노래라 생소하지만, 순간마다 캐릭터들의 침묵 너머 속마음을 대변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번역된 자막이 없었더라도 분명 와닿았을 거야.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노래가 하나 있는데, 핀란드의 듀오밴드 Maustetytöt의 <Syntynyt suruun ja puettu pettymyksin>다. 향신료소녀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엉뚱한 팀명에, "슬픔 속에서 태어나, 실망으로 옷을 입혀진" 이라는 제목. 체념과 우울로 가득한 가사지만, 신디사이저 기반의 인디팝이라 오히려 내면의 흥을 살랑인다. 감정이 배제된 대사들 사이에서 나른한 유머가 압권인, 이 영화의 정서와 굉장히 잘 맞는 기분.


https://youtu.be/Ulrss-bwRVk?list=RDUlrss-bwR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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