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 전, 갑작스러운 사고로 4살짜리 아들 대니를 잃고 충격과 우울 속에 살아가는 베카와 하위 부부. 괜찮다고 하지만 얼굴에 슬픔이 스치는 걸 막을 수 없기에, 이웃과 가족들은 눈치만 보고 있다. 아픔을 신경 쓰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배려는 배제로 느껴져 신경을 긁고, 위로는 성급한 조언이 되어 화를 돋운다. 심지어 당사자인 부부의 마음도 엇갈리며 삶의 골은 점점 깊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베카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소년의 뒤를 밟는다. 그의 집을 알아내고, 그가 읽고 있는 책도 빌려보며, 소년의 현재를 살피는 베카. 어떤 애도의 말도 튕겨내던 그녀였는데, 소년이 심취한 평행세계가 뭐라고 희한하게 눈길이 간다. 지겹게 듣던 응원도, 경험자들의 조언도 하나 없는데, 공원에서 잠깐의 만남이 어째서 위로가 되는지. 그렇게 베카는 조금씩 휑하니 뚫린 구멍을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 그 안에 당장의 토끼는 보이지 않더라도.
# 맞는 말의 폭력
말 못 하고 누워있는 갓난아이를 보고 있으면 문득 궁금해진다. 도대체 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몸의 언어로 뭔가 전하려는 건 느껴지는데, 왠지 다른 차원에 서식하는 외계인 같단 말이지. 그러다가 입안에서 맴돌던 옹알이가, 내가 아는 단어와 슬쩍 닿기라도 하면 눈이 번쩍 뜨인다. 문장이랄게 전혀 아닌데 우리 둘 사이에 왠지 모를 기대가 생긴다. 조금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영국의 언어학자 데이비드 크리스털은 아기의 뇌 속에 ‘언어습득 장치’가 들어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태어난 후 가능한 이른 시점부터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는 것. 즉 말이란, 명확한 커리큘럼이 없어도 눈치로라도 익혀내 버리는 삶의 스킬인 셈이다. 아마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서로에게 쉽고 빠르게 연결하는 방법으로 이만한 게 없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완벽하게 공구를 닦아 놨어도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어디 하나는 꼭 흠집이 나듯, 말이 가능한 것과 대화가 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저 단어의 나열만으로 듣는 이의 입장과 역사를 다독인다면 모두가 시인일 테지. ‘뭐라고 하려고 하는 건 아닌데’라고 시작하면 대개 혼내려는 말이고, ‘너 좋으라고 하는 얘기’에 한 번도 즐거운 적이 없지 않나. 호의로 전하는 말이라 해도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그저 소음일 뿐이다. 대화의 기본을 잃어버린 ‘맞는 말’은 그렇게 ‘쳐 맞는 말’이 된다.
영화 <래빗 홀>의 베카의 귀에도 무의미한 소리만 가득하다. 천사가 필요해서 신이 데려갔을 거라는 애도 모임의 간증은, 역겨운 자기 마취로밖에 안 보인다. 엄마도 자식을 잃은 경험이 있다며 베카에게 공감을 시도하지만, 헤로인 과다로 죽은 오빠랑 비교하는 건 화가 난다. 이 와중에 아이가 생겨버린 동생 리지의 조심스러움은, 내 아픔을 건드리는 못된 바늘로만 보인다. 취급주의 앞에서 힘을 못 내는 인류 최고의 생존 도구. 활용 방법이 정말 없는 걸까.
# 서로의 언어를 읽는 법
선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땐 답답하다. 고르고 고른 나의 단어가 부정당한 느낌이니까. 베카를 바라보는 주변인들 역시 한숨이 늘어간다. 슬픔을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애도 공식에 아무리 대입해도 값이 안 나오니 참. 얼마나 더 친절하게 이해해주고 보듬어줘야 할지 혼란스럽다. 그렇다면 검산을 한번 해봐야지. 아픔의 몫을 떼어가려는 내 위로는 충분히 순수했는지.
영화 초반, 정원을 손보는 베카에게 안부를 묻던 페그 부인을 떠올려보자. 참 예쁘게 가꿨다며 분위기를 띄우고는 베카 부부를 저녁 파티에 초대한다. 함께 극복하자는 세심한 제안처럼 들린다. 그런데 웬걸, 꽃 한 송이를 밟아버린 실수에 따뜻함은 이내 무색해진다.
물론 동굴 속으로 손을 먼저 내민 그 시도 자체를 폄훼할 순 없다. 하지만 그 마음 너머, 좋은 이웃이 되려면 응당 아픔을 함께 헤아려야 한다는 맹목적 의무는 없었을까. 옆집이라 마냥 떠들 수 없는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고 싶진 않았을까. '정원을 그저 예전처럼 보이게 하려고 노력 중'이라는 베카의 대답을 제대로 듣기만 했어도 벌어지지 않을 일일 텐데. 내가 세운 위로의 기술에만 집중하다 보니, 다정한 이웃은 정원을 해치는 불청객이 되고 만다.
마음을 읽지 못해 대화가 무너지는 건 베카와 엄마 사이에서도 벌어진다. 애도 모임에 반감을 품은 베카에게 본인 경험을 예로 들며, 종교적 승화가 평안을 준다고 말하는 엄마. 딸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한 조언이겠지만, 그 너머엔 그 슬픔을 보고 싶지 않은 당신의 고통도 포함됐으리라. 경험자의 안타까움은 위안을 찾아야 한다는 강요가 되고, 애도의 핸들을 뺏기지 않으려는 당사자는 문을 닫아버린다.
“신이 선하다면 갑작스러운 상실이 왜 일어나는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이유가 있다는 설명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위안을 찾으려는 시도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단지 위안의 방식은 하나 이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존 카메론 미첼 감독 인터뷰
영화 <레빗 홀>을 연출한 존 카메론 미첼 감독은 형을 잃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극복의 매뉴얼이 일으키는 인간소외를 짚는다. 베카의 오빠와 아들이 세상을 떠난 배경도, 애도 모임에서 털어놓는 갖가지 사연들도 모양새가 다른데, 극복의 옷을 유니폼처럼 입을 순 없지 않나. 애도 모임 8년 차 커플의 미소 너머, 불안이 보이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테다.
그래서 감독은 자신의 페이스를 찾으려는 베카의 불안한 도전 사이로, 위안의 여러 방식을 불어 넣기로 한다.
베카를 도와 집안 물건을 정리하던 중 잊혔던 며느리의 이름을 꺼내는 엄마. 아들이 죽고 나서도 한동안 집을 떠나지 않았던 며느리 때문에 더 고달팠다는, 아무도 몰랐던 속사정이다. 제안도 강요도 없기에 베카 스스로 읽을 기회가 생긴 엄마의 서사. 경험의 권위보단 같은 취약성을 공유할 때, 비로소 서로를 이해할 물꼬가 트였다.
상실의 운명공동체인 부부에게도 시련이 있다. 정리하고 거리두기를 원했던 베카. 보존하고 기억하면서 극복하려던 하위. 감독은 남편 하위와의 평행선 싸움을 두고 “둘 다 옳고, 둘 다 틀리다”라고 말한다. 전지전능한 힘이 도와준대도, 애도에 완치는 없고 고통은 주머니 속 벽돌 조각처럼 늘 남아있는 법. 감독의 인터뷰엔 정답지에 자신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스친다.
이에 영화 말미, 하위는 작은 일부터 해보고 그 뒤는 알 수 없는 것이라며, 극복의 청사진을 내려놓기로 한다. 늘 자기 노선이 완강했던 두 사람이었는데, 불확실한 미래에 오히려 손을 맞잡는 부부.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순간 그제야 보이기 시작한다. 옳고 그름의 애도 굴레에서 벗어나, 함께 희망을 읽어낼 서로의 행간이.
# 평행세계의 규칙
위로는 태생적으로 따뜻한 것인데, 복잡하게 생각할 일인가 싶기도 하다. 워낙 날카로운 세상이라 작은 온기만으로도 감사하니까. 하지만 그래서 더욱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위로는 주고받기보단 대개 한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정서적 우위가 눈을 가릴 때가 있단 말이지. 시혜적인 태도가 타인의 세계를 점령하는지도 모른 채.
하지만 모두 수십 년을 살아온 인생의 경향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타인을 판단하게 되는 건 뇌의 무조건반사가 아닌가. 게다가 측은지심은 미덕인데, 다가가지 않고선 그 마음을 어떻게 전한다는 건지 혼란스럽다.
“목표는 단 하나였습니다.
관객과 인물 사이에 놓인 모든 것을 최소화하는 것.”
- 존 카메론 미첼 감독 인터뷰
상실을 다룬 영화지만 위로의 말을 줄이고 침묵을 남기고 싶었다는 감독. 그는 멋진 촬영 디자인과 감독의 메시지가 전면에 드러나는 순간, 영화가 슬픔을 대하는 태도를 망칠 것이라 여겼다. 아픔을 함부로 해석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는 것. 당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주는 것. 그러기 위해선 내 눈의 이해를 걷어내고 거리를 존중하며 바라봐 달라는 바람이다.
영화 <래빗 홀>에는 이러한 감독의 마음을 반영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등장한다. 바로 제이슨이 만화책으로 그리고 있는 평행우주. 그의 그림을 보면 무수한 통로들이 얽혀있다. 그 끝에는 같은 얼굴이지만 다양한 상황의 가족들이 존재한다. 변수도 많고 교통정리도 복잡한 세계관인데, 신기하게도 각 터널은 이리저리 구부러져 서로의 거리를 유지한다. 미디어를 통해 익히 알고 있듯, 평행세계에 개입하는 순간 서로의 시간선은 무너져 내리니까. 그런데 그 위기가 비단 평행세계 뿐이랴.
마법같이 유지되는 이 SF 세계관을 보고 있으면, 우리 사는 세상이 겹쳐보인다. 아무리 이해해보려 해도, 타인의 주관적 경험에 끝내 도달하지 못한 기억은 누구나 있지 않나. 모든 자아에는 나름의 속도와 방향이 존재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제이슨이 그린 만화가 호쾌한 액션 히어로물이 아닌, 돌아가신 아버지를 먼발치에서 보고 돌아가는 이야기인 것 역시 눈길이 간다. 왜곡하지 않을 적당한 간격으로 서로의 삶을 인정하려는 감독의 태도가 아닐까. 베카는 그런 제이슨의 만화속에서 서로를 제대로 읽을 마음의 공간을 발견한다. 여기에 비밀이 있었다. 언어습득 장치만으론 배울 수 없는 위로의 기술이.
개입을 자제한단 이유로 일부러 건조할 필요는 없을 테다. 아픔을 무기로 모두에게 차가운 것도 능사가 아니다. 대화가 사라진 곳에선 생존할 수 없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마든지 손님을 초대할 수 있고, 사소하게 웃고 떠들 수 있다. 안부도 잔뜩 물을 수 있고, 따뜻한 음식도 나눠 먹을 수 있다. 대신 한 가지만 지켜보면 어떨까. 대화를 마무리하고 돌아갈 때, 들어왔던 토끼 굴 문만 잘 닫아주고 떠나는 걸로. 방문한 사람이나, 초대한 사람이나, 모두의 평행세계를 지킬 수 있도록.
# 영화에 등장한 책『Parallel Universes』는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인 프레드 앨런울프가 쓴 양자역학 이론서다. 상처와 공감, 치유와 응원의 메시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과학도서인데, 주인공 베카의 마음을 다독여 준다니 의아하기도 했다. 근거와 분석은 그저 차가운 사실을 입증할 뿐 아닌가. 위로라면 적어도 일말의 온기는 있어야 하는거 아닐까.
그러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책 한권이 떠올랐다. 바로 심채경 박사님의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라는 에세이. 천문학자는 별을 분석하고 관찰해서 우주의 답을 알아내는 사람 아니었나. 어째서 별을 보지 않는다고 할까. 그 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읽으면서 내린 나만의 답)은 바로 이 구절에 있었다.
그가 슬플 때 당장 해가 지도록 명령해줄 수는 없지만, 해 지는 것을 보려면 어느쪽으로 걸어야 하는지 넌지시 알려주겠다. 천문학자가 꽤 쓸모가 있다.
심채경,『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p165.
양자역학의 이론처럼, 태양의 주기는 그저 차가운 우주의 언어에 불과할 지 모른다. 하지만 과학이 그 기록 너머의 인간세계를 바라보고자 할 때, 왠지 모를 따뜻함이 결국은 드러나는 게 아닐까 싶다. 평행우주도, 별의 이동도, 인간을 더 잘 바라보기 위해 시작된 공부였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