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11년에 접어든 일본. 평화로워 보이는 도쿄의 어느 마을에 한 검객이 나타난다. 한때 유신 지사의 편에 서서 막부 관료들을 제거하던 전설적인 암살자, 히무라 발도재. 지금은 켄신이란 본명으로 지난날을 숨긴 채 조용히 흘러가는 중이다. 다시는 사람을 해치지 않겠다는 후회와 반성과 함께.
하지만 그의 다짐은 매일 도전의 연속이다. 새 권력이 평화라는 이름 아래 동란의 상처를 숨긴 탓일까. 혼란의 틈을 타 불의한 세력이 마을을 위협하고, 발도재를 사칭하는 이까지 등장한다. 사람을 벨 수 없도록 날이 반대로 선 '역날검'을 차고 있건만, 칼잡이의 본능이 꿈틀대는 켄신. 방랑객인 자신을 받아준 '카미야 활심류' 도장, 그리고 곁에 머물며 마음을 나누는 동료들을 지켜내야 하기에 그는 끊임없이 되묻는다. 자신의 신념을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지.
# 신념의 비효율성
인간은 살면서 몇 번의 다짐을 할까. 새해에는 늘 헬스장을 등록하고, 헤어진 연인의 물건을 죄다 버려도,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오는 타임슬립 인생. 이런 반복에 헛웃음이 나기도 한다.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2만 번은 족히 한 것 같단 말이지.
그래도 괜찮다. 리셋의 부담이 크지 않다. 자신과의 약속을 가벼이 여길 건 아니지만, 심하게 문책할 필요는 없지. 생활 태도에 대한 결심이 무너졌을 땐, 스스로 꿀밤 한 대 주고 말일이다. 수없이 벌어지는 작심삼일이니 가볍게 바라볼 법도 한데, 그 와중에 나를 자꾸 괴롭히는 다짐이 있다.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을 때 계속 귀찮게 울리는 신호음”(마이클 슈어,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2023)처럼, 뭔가 어긋난 마음속 한구석이 걸리적댄다. 그것은 옳지 않은 거라고.
양심의 영역에서 신념을 지킨다는 일은 고독하다. 다들 손쉽게 타협하는데 바보처럼 구는 건 아닌가 싶다. 영리하다는 이름 아래 무너진 규칙을 보고 있으면, 모순인 건 나인지 세상인지 혼란스럽다.
영화 <바람의 검심>의 배경인 메이지 유신 시대도, 정의의 기준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막부 시대가 종식되며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 했지만, 권력의 모습은 달라진 게 없다. 모든 국민이 칼을 차고 다니지 못하도록 하는 '폐도령(廢刀令)'에도, 저잣거리의 칼부림은 여전하다. 하지만 켄신은 자신과 동료를 지켜야 할 때마저, 역날검을 고집하며 적을 해치길 주저한다. 도대체 그는 왜 칼잡이의 본능과 치열하게 싸우면서 대결의 불리함을 견뎌내는 걸까.
"그 한번이 문제야. 지금 여기서 검을 뽑아 베게 되면 마음의 빗장이 풀려. 그다음은 칼잡이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돼"
- 만화 <바람의 검심> 8권
편의와 이익을 위해 눈 한번 감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 싶지만, 지워지지 않는 시대의 피 냄새가 그를 여전히 괴롭힌다. 그 순간을 놓치면 자신을 잃어버릴 거라고 누군가 계속 속삭인다. 그렇게 켄신은 비효율의 길을 걸어간다. 아무도 죽일 수 없는 역날검을 들고.
# 누굴 위한 역날검인가
타협의 유혹에 맞서 애를 쓰는 그의 모습이 영화 내내 흐르지만, 사실 그만큼 신념을 꺾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각자의 결심은 삶의 중요한 변곡점에 기인했을 터, 자신의 존재 이유이자 인생을 유지하는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카미야 활심류 도장의 카오루가 유파의 정신인 '활인검(사람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검술)'을 끝까지 지키려는 모습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묻어있다. 영화 <바람의 검심>의 속편에는 메이지 유신을 무너뜨리려는 악당 시시오가 등장하는데, 악에 받친 그의 분노는 자신을 쓰고 버린 정권에 대한 복수심 때문일 테다. 이유의 색은 달라도 신념이 된 이상, 누구도 건들 수 없는 철옹성이 되고 만다.
켄신 역시 유신 지사로서 수많은 사람을 베어냈던 것도, 그가 정의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일념 속에서였다. 시대의 요구를 믿었기에, 그의 칼날엔 어떤 도덕적 의심도 들어올 틈이 없었다. 하지만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휘두른 몸부림은 어느새 숨겨야 하는 살육이 되었고, 회피와 은폐 위에 올라선 현실은, 자신을 환멸케 하는 거울이 되었다. 그 시절의 처참했던 폭력은 오직 사지에 내몰렸던 이들만의 기억인 걸까. 단단했던 그의 세상은 그렇게 무너졌다.
"유신은 10년 전에 달성됐고, 새 시대 메이지가 열렸지. 허나 진정 행복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약자가 고통받는 낡은 시대 안에 갇혀있다. 메이지 유신에 희생된 이들에게 보상하고 싶다. 칼잡이 발도재가 죽인 사람들의 죗값을."
- 만화 바람의 검심 1권
그가 맞이한 새로운 변곡점엔 이전과는 다른 감정이 담겨있다. 바로 과거에 대한 속죄. 이상향과 자기 긍정에서 출발한 신념은 추진력을 갖지만, 속죄는 반성과 자기부정을 기반으로 하기에 성취를 논할 수가 없다. 살아온 관성과 남아있는 본능 탓에, 시선도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야 한다. 덕분에 매일이 도전이며 숙제다. 천 번을 절제해도 단 한 번 칼날을 뒤집는 순간 과거로 돌아가 버리는 위태로운 다짐. 죄의식에 기반한 신념은 지칠 수밖에 없다. 끝이 보이지 않거든.
그 덕에 지난날을 반성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켄신의 노력은 고난이다. 과거의 명성이 업보인지 도전자들이 끊이지 않고, 시대의 혼란이 연이어 그를 위기로 몰아넣는다. 그럴 때마다 그의 손은 허리춤의 칼자루에 간다. 가장 편하고, 가장 쉽고, 가장 잘하는 방식이니까. 신념의 문턱은 자꾸 낮아지지만, 무력 이외엔 대안이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켄신은 역날검을 손에 쥔다. 다짐이 흔들릴 가능성을 물리적으로 낮추기 위해. 혹시나 모를 참극을 막기 위해. 가장 확실하지만 어쩌면 고통스러운 전략인 셈이다. 신념을 지키기에 불완전한 자신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므로.
하지만 난폭한 무기에 대항해야 하는데, 무딘 칼날로 적을 제압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주변을 더 위험에 빠뜨리게도, 오히려 본능을 더 자극하기도 하니까. 상대를 살리려는 역날검이지만, 칼의 예리한 쪽이 자신을 향하고 있단 사실도 아이러니다. "네 쪽을 향한 칼날이 널 괴롭힐 거다"라며 비웃는 악당의 한마디가 정곡을 찌른다.
신념을 지키는 것에만 너무 몰입하다 보면, 때론 자기파괴로 이어질 거란 경고인 걸까. 참회의 속성이란 측면에선 이해는 되는데 왠지 씁쓸한 기분을 떨치기 어렵다. 반성 없는 세상은 오히려 태평성대를 외피 삼아 떵떵거리고 있거든. 악인은 언제나 꿀잠 자거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며 마음속 안전벨트 경고음을 들으려는 선한 마음은, 대체 누가 구원해주나.
# 생명을 쫓는 기술
정의로운 삶을 살기엔 부작용이 많은 절망의 시대. 사력을 다해 매 순간 싸워내라며 독려하기엔 인생이 가혹하다. 그러다 보니 주변과 적을 모두 구하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는 켄신을 어찌 만류할수 있을까. 애쓰고 있는 것만으로도 존경스러운걸.
한데 다친 상처가 나을 틈 없이 덧입어 곪는 모습은 속상하다. 다짐을 감당하지 못해 좌절하는 우리의 모양새가 스치기도 한단 말이지. 이대론 결국 신념에 잡아먹힐 거야. 지는 인생이 오히려 편한 걸까. 지속 가능한 신념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이에 영화 <바람의 검심>은 켄신의 스승 세이쥬로를 통해 잊고 있던 작은 진리를 짚어준다.
"사람을 베고 수많은 목숨을 뺏은 너는, 그 후회와 죄책감 때문에 네 목숨의 무게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그걸 극복하려면 지금 네가 죽음의 공포에서 발견한 살려는 의지가 필요해. 네 목숨도 한 사람의 목숨이다. 그 무게를 알아야 오의(奧義, 마지막 경지)로 통하는 길이 열린다."
-영화 <바람의 검심3: 전설의 최후>
희생은 숭고한 일이지만, 나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방향으로 기울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 사즉생의 가치도 결국 자신을 소중히 여길 때 비로소 빛나는 것임을 시사한다. 그러고보니 켄신이 머무르는 도장 한가운데에도 늘 적혀있었지. ‘인간을 살리려는 마음을 근본으로 삼는 카미야 유파’라는 뜻의 <카미야 활심유(神谷活心流)>. 상대를 해치지 않기 위한 자아 성찰과 수련의 메시지 인줄만 알았는데, 다시 보니 세이쥬로의 가르침과 맥이 통한다.
선한 의도는 대개 타인을 향하는지라, 나에게 비춰볼 일은 없기에 깨닫지 못했던 진실. 지켜야 하는 ‘인간’에 자신도 포함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영화는 스승이 마지막 비기를 전수하듯, 내 생명의 무게를 바라보게 한다. 신념이 당신을 해치지 않도록. 그리고 당신이 신념을 잃지 않도록.
사실 영화 <바람의 검심>은 시리즈 내내 생명의 소중함을 전하고 있었다. 형제를 잃은 아이에겐 "죽은 자가 바라는 건 살아있는 자의 행복(바람의 검심2: 쿄토 대화재)"이라며 다독이고, 누나의 죽음에 복수의 칼을 갈다 빌런이 되어버린 사내에겐 "누님을 위해서라도 살아달라(바람의 검심4: 더 파이널)" 전한다.
시대가 원한 임무에 휩쓸려 살인 검객이 되었던 켄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살아있어도 되는지 끊임없이 되물으며 자신을 무수히 찔러댔던 그에게, 결국 스승이 전한 대답은 하나다. 살아야 한다. 잘못을 덮어버린 메이지 정권처럼 없던 일로 하라는 뻔뻔함이 아니다. 질문을 바꾸라는 얘기다. 지난날을 잊지 않기 위해,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묻는 것으로. 모두를 위한 역날검도 손에 꽉 쥔 채.
물론 영화처럼 목숨을 걸 신념을 가질 일은 드물 테다. 그렇다고 내가 버티기에 무겁지 않은 건 아니잖나. 마음속 경고등에 지치고, 자기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건 매한가지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다짐에 괜한 자괴감이 들 땐, 켄신과 친구들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겠다.
서로 함께 살아있기에, 신념도 있는 거라고.
# 개인적으로 지정한 <바람의 검심> 주간을 맞아, 원작 만화책 22권(개정판)과 영화 시리즈 5편을 보는 내내 몇번이고 마음속에 떠오른 드라마가 있었다. 바로 미국 시트콤 <굿 플레이스>.
담당자의 실수로 굿 플레이스에 온 주인공 엘레나가 배드 플레이스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로, 사후세계에서 벌어지는 소동극을 통해 '인간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지'를 묻는 작품이다. (연출자인 마이클 슈어 작가는 이 드라마를 연출하며 배운 철학적 메시지를 책으로 남겼는데, 서두에 언급했던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이 바로 그 책이다.)
켄신도 자신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나의 참회는 끝이 있는 건지. 나는 죽을때까지 악인으로 남는 것인지. 자기반성의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켄신에게, 드라마 <굿 플레이스>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다.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도, 그 노력만으로도 우리는 좋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