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부산. 고3 여학생 세리는, 같은 학교 최고의 인기남 김현을 좋아하고 있다.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현이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 치명적인 걸림돌이 있어서 고민이다. 정보통에 의하면 김현은 찰랑찰랑 생머리를 좋아한다는 것. 악성 곱슬머리가 콤플렉스인 세리는 마음을 다잡는다. 고백 성공을 위해 이 지긋지긋한 꼬부랑 머리를 곧게 펴고 말겠다고.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세리의 반으로 윤석이 전학을 온다. 세리가 바다에 빠졌던 윤석을 구해줬던 걸 계기로 가깝게 지내기 시작하는데, 이게 웬걸. 윤석의 엄마가 동네에 미용실을 한다니. 심지어 그 가게에선 그동안 볼 수 없던 신개념 시술, 서울 매직스트레이트를 제공한단다. 다친 윤석의 등하교를 도우며 비싼 매직 시술의 기회를 엿보는 세리. 그렇게 하나씩 고백의 자격을 쌓아가는 그녀는, 어느 날 문득 자신에게 묻게 된다. 풀어내야 했던 건 정말 머리카락이었을까.
# 자격의 자격
오디션 프로그램에 등장했던 한 참가자가 기억난다. 자신을 야망 가수라 칭하며 크게 될 인재로 자평하던 참가자. 심사위원들은 그의 기개에 박수를 보내고 웃음 짓지만, 왠지 모르게 그 너머에 걱정과 탄식이 스친다. 저렇게 밑밥을 깔면 잘해야 본전일 텐데, 혹은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는 듯이.
뚜껑을 열어보니 허세가 아니었다. 무대를 장악했고,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높은 평가에 시청자로서 마음을 쓸어내렸다. 근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무대를 흥겹게 들었으면 됐지, 여기에 안도감을 느낄 일인가.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다며 뒤늦은 박수를 보내는 손이 민망해진다. 오디션이니 당연히 실력을 들고 와야 하는 건 맞지만, 그의 자신감에 꼭 내가 원하는 근거가 있어야 했을까.
누구도 도와주지 않기에 스스로 어필해야 하는, 절대 경쟁 자기 PR 시대. 그러나 여전히 대한민국에선 허세는 필패고 겸손은 미덕이다. 자랑에도 태도가 중요하다며 서로의 긍지를 엄격하게 점수 매긴다. 그 덕에 뽐낼 수 있는 기준은 외부의 시선에 머물게 된다. ‘자격’이라는 이름으로.
“이란성 쌍둥이 혜리와는 달리 내 머리는 꼬이기 시작했고, 내 인생 또한 꼬이기 시작했다”
영화 <고백의 역사> 속 주인공 세리 역시, 더없이 푸른 청춘의 마음을 ‘자격’ 아래 미뤄놓는다. 물론 다짜고짜 애꿎은 곱슬머리 탓을 하는 건 아니다. 옆집 오빠에게 고백하려고 준비하던 찰나, 생머리를 흔드는 혜리가 먼저 그 오빠와 데이트를 나가버린 기억. 킹카 김현이 파마머리 성유리보단 생머리 이효리를 좋아한다는 소문. 세상은 매끄럽게 쭉 뻗은 머릿결에 환호하는데, 내 뽀글머리는 죽었다 깨도 펴지질 않는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겠지. 고백 자격 미달. 언제부터 호감 표시에 라이센스가 있었나 싶지만, 한발 물러서는 세리의 등을 떠밀 수가 없다. 세상의 기준에 얼어버리는 건 마찬가지라.
# 숨길 수 없는 것
인간은 본능적으로 ‘위험’에 먼저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작은 결함이나 흠이 눈에 띄면, 그것이 전체 인식의 중심이 되고 나머지는 흐려진다. 아쉬운 판단처럼 보이지만 주류에 벗어났을 때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게 진화됐다는데 어쩔 수 없지. 부정 편향성은 생존 법칙인 셈이니까. 한데, 그저 선택권 없이 타고난 것으로 지적받다니 슬프지 않은가. 단점을 보완하느라 변방으로 밀려난 내 모습은 도대체 누가 챙기나.
영화 속 세리에게 돌아가 보자. 콤플렉스에 가려서 그녀가 놓치고 있는 건 없을까. 전교생의 절반이 짝사랑하는 대스타라면, 공공재의 영역에 들어갔다고 봐야 한다. 괜히 함부로 나섰다간 구설수의 위험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곱슬머리에 애를 먹곤 있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옆 반 미진이가 학을 천 마리 접었다면, 우리는 학알 만 개를 접겠다는 세리. 불리함은 인지하나 불가능하진 않을 거란 다짐 속에, 그녀의 자기 확신과 자존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다리를 다친 윤석이 등교에 애를 먹는 걸 보고는 곧바로 나서서 우산과 가방을 들어준다. 윤석의 엄마가 미용실을 한다는 사실을 아직 알기 전이었던 걸 보면, 적극적으로 주변을 돕는 따뜻함도 가득하다. 수영도 잘한다. 해안가에 산대도 모두가 헤엄에 일가견이 있는 게 아닌데, 심지어 바다 수영을 즐기다니. 운동신경마저 뛰어나다.
이처럼 자유롭고 건강한데 번화가 거리에 나타난 김현 앞에선 바로 쪼그라드는 게 그녀의 현실. 혹여나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들킬세라 냉큼 숨어버리는 모습이 안쓰럽다.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란 장점은, 단 하나의 열등감에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그녀의 고백이 성공할 거라고 아무리 친구들이 응원해도 결국은 소용없다. “김현이 눈이 삐었나! 사람이 수준이란 게 있는 기다!”라며 면박 주는 반장의 말에 열심히 채워가던 학알 접기도 동력을 잃어버리니까.
곱슬머리에 갇혀버린 세리의 모습에 겹쳐 떠오르는 캐릭터가 있다. 영화 <어느 날 인생이 엉켰다>의 주인공 바이올렛.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교육 아래 단정한 머리를 유지하고 살아왔다. 달궈진 빗으로 걸리는 곳이 없도록 한 올 한 올 관리해 온 그녀. 이유는 하나다. 완벽한 외모가 사랑받는 기준이기 때문에. 덕분에 수영은 절대 금지에, 비 소식을 알리는 일기예보는 필수 시청이다. 숨겨놓은 곱슬머리가 삐져나오면 안 되니까. 심지어 남자친구와의 스킨십 와중에도, 머리 만지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는 바이올렛. 빳빳한 머릿결이 없는 그녀의 삶은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드라마 <나기의 휴식>의 주인공 나기 역시 비슷한 이유로 매일 아침 머리를 편다. 매사에 눈치 보고 분위기를 맞추며 사람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애쓰는 그녀. 그러니 찰랑찰랑하고 쭉 뻗은 머리카락이 너무 좋다는 남자친구의 말을 어찌 흘릴 수 있을까. 새벽같이 일어나 수고스러운 고데기질을 할 수밖에. 하지만 그렇게 상대의 호흡을 맞추는 데만 집중하던 그녀는, 결국 과호흡에 쓰러지기에 이른다.
바이올렛과 나기, 그리고 세리. 모두 각자의 아름다움과 고유함이 있음에도, 세간이 곱슬머리를 바라보는 시선에 자신을 ‘악성’ 인자로 취급하며 고치려 한다. 두피를 파고들기에 치료가 필요한 악성 곱슬머리도 아니면서 말이다. 게다가 악성이 아니란 사실은 이들을 더 힘들게 한다. 내가 좀 더 애쓰면 인생의 오점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거든.
하지만 탈무드에 그런 말이 있지 않나. 아무리 감춰도 재채기와 가난, 그리고 사랑은 드러나고 만다고. 있어 보이는 이 문장을 들여다보면 곱슬머리의 속성과 다르지 않다. 비 맞으면 원래 모습대로 꼬부라지는 것처럼, 본 모습은 절대 나를 두고 떠나지 않는다는 것. 밀어내고 덮어놔도 기를 쓰고 나타나는 이놈의 콤플렉스는 그럼 어째야 하나.
# 꼬이고 얽히면 결국
이쯤에서 콤플렉스라는 말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력 어원은 ‘끌어안다, 감싸다, 포함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Complecti. 이는 영어 콤플렉스(Complex)로 정착하며 ‘여러 요소가 얽혀 하나로 감싸진 상태’를 뜻하게 됐다고 한다. 이후 심리학자 칼 융은 인간 정서에 작용하는 특정 현상에 집중하는데, ‘감정적으로 결속된 관념 혹은 기억의 집합’을 나타내는 심리학 용어로 콤플렉스를 사용한다.
다시 말해 콤플렉스란, 특정 주제에 관해 기억과 욕망 등이 얽히고 뭉쳐진 복잡함을 이를 뿐이다. 여기엔 어떤 우열도 없다. 그저 하나의 상태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그만 땅덩어리다 보니, 간단한 자격 기준에 금세 줄 세우기가 되어서 그럴까. 이상하게도 콤플렉스의 개념은 한국어로 넘어오며, 비교 폄하의 열등감으로 작동한다. 누구나 각자의 배경과 상황에 따라 감정과 사고가 뒤섞인 채 살아가지 않나. 그렇다는 건 모두가 복잡한 인생사, 즉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콤플렉스 한가운데 있는 셈인데 말이다.
이에 영화 <고백의 역사>는 흠집만 바라보는 우리에게 넓은 시선을 가지길 조심스레 권유한다. 머리도 펴고, 학알도 다 접고, 고백 조건을 모두 마친 세리. 김현과 마주하는 대망의 순간이 찾아왔는데, 왠지 마음속 한구석이 불편하다. 불러내 놓고 망설이다 결국 세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항상 내가 변해야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잘해야 할 것 같고, 예뻐져야 할 것 같고. 그런데 그 애 앞에서는 그런 생각이 하나도 안 든다.”
응당 이래야 한다는 자격과 기준에 매몰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인정하는 순간, 콤플렉스는 더 이상 해결해내야 하는 장애물이 아니게 된다. 서로를 알아보는 수많은 기준 중 하나이며, 결함의 증거가 아닌 자신을 이해하는 기술이 되는 셈이다. 언뜻 비뚤어지고 꼬여 보일 때도 있을 터다. 하지만 실이 꼬이면 매듭이 생기고, 그 매듭은 새로운 장식이나 무늬가 되듯이, 그 복잡함 자체가 나이고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고 말 것이다.
그토록 찾아 헤맨 자격의 비밀은 여기에 있었다. 자신감의 자격은 심사위원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믿는 것에서 나오듯이. 고백의 자격은 서울 매직 스트레이트가 아닌,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그렇게 세리의 곱슬머리를 회복시킨다.
하지만 알다시피 타인과 비교의식을 거둔다는 건 쉽지 않다. TV에도 핸드폰에도 더 나은 삶을 꿈꾸라고 떠들어대니까. 더욱이 그 말에 홀려 애써본다 해도, 비교 우위에 있는 경우는 드물어서 스트레스다. 나를 사랑하라는 당연한 말처럼 실행하기 어려운 게 또 없다. 그럴 땐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속상해하는 세리에게 아빠가 전하는 말을 떠올려보자.
“아빠가 세리한테 기대가 왜 없어! 성적을 기대 안한다 뿐이지”
못하는 것에 애써 기대해서 속상해하지 않는 걸로. 눈을 살짝만 돌려도 복잡하게 어우러진 수많은 무늬가 내 기대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 부산, 90년대 후반 그리고 고등학생이 등장하는 콘텐츠는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된 기분이다. 시작과 동시에 이미 친근하다. 세리의 친구들이 광안리에서 고백 퍼포먼스를 할 때, 그 옆으로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성시원 윤윤재가 투닥거리면서 지나갈 것 같고, 저 멀리서 영화 <바람>의 짱구가 몬스타 행님들을 모시고 으리으리하게 걸어가고 있을 것 같다. 설정이 익숙하다는 건 심리적 거리감을 가깝게 하는 유리한 점도 있지만, 반대로 비슷한 배경의 작품끼리 비교하기 쉽다는 리스크도 안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뭐가됐든 미소를 짓게하는 마법이 있다. 다같이 모여 학알을 접고, 그 시절 노래에 춤추고, <짱> <오디션>등의 만화를 읽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이미 성공이다. 시간이 흘러도 절대 변하지 않는 그 시절의 감성. 아무리 현대과학에 때묻어도 추억이 일깨워주는 자아는 여전하나보다. 하이틴 레트로는 사랑이다.
그 중에서도, 수학여행 캠프파이어에서 무한대 돌림노래인 <사랑으로>가 울려퍼지는 순간은 절정이야.
https://youtu.be/uuJ-SCwk7Z0?list=RDuuJ-SCwk7Z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