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어느 고등학교. 한 남학생이 학급비 도난사건으로 추궁받고 있다. 분명 누명인데 누구도 억울함을 들어주지 않는다. 어쩌면 다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지 그를 괴롭혀도 괜찮은, 아니 괴롭혀야만 하는 분위기가 있거든. 다름을 넘어 틀린 사람이 되어있는 린슈웨이에게, 교실은 절망 그 자체다.
자신을 괴롭혔던 런하오 무리와 지역봉사를 나가게 된 린슈웨이. 그곳에서 아이들은 우연히 식인 괴물을 붙잡는다. 괴력의 생명체에 두려움이 앞서지만, 약점은 언제나 관계를 뒤집는 법. 햇빛에 취약한 몬스터 앞에, 폭력의 본능이 고개를 내민다. 당하는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아 불편한데. 어라, 강자의 선 안쪽으로 물러선 린슈웨이의 기분이 미묘하다. 외면하는 발걸음이 왠지 어렵지 않다. 그토록 증오했던 그들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어린 괴물의 슬픈 눈이 그에게 묻는다. 자 이제 누가 괴물이지?
# 정상 범위의 기준
어떤 사람의 능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날 때, 종종 ‘괴물’이라는 수식을 붙인다. 극찬의 표현이지만 동시에 괜한 거리감이 묻어있다. 앞에 섰을 때 느껴지는 무력감, 따라잡을 수 없다는 좌절, 비교당하는 듯한 열등감까지. 그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으니, 인간의 영역 밖으로 밀어내는 시도가 필요했을 터다. 부족한 나를 보편범주에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자존감을 지키려는 시도는 좋다. 하지만 주의가 필요하다. 다름은 불안을 조성하고, 때로는 혐오스러운 형상을 부여하기도 하니까. 칭찬보단 흠집이 눈에 더 쉽게 띄기 때문이겠지. 나로서 존재하는 것만으론 부족한 걸까. 튀어나온 이들을 솎아내야 왠지 편안하다. 보통의 기준을 가르는 손가락은 그렇게 특별한 기능을 수행한다. 나는 저 존재와 다르다는 선언. 나는 다수에 속해 있다는 확인. 바로 선을 긋는 것이다.
"네가 나처럼 안됐으면 좋겠어"
"꺼져! 누가 너처럼 된대? 꺼져!!"
- 영화 <몬몬몬 몬스터>
영화 <몬몬몬 몬스터>는 구획을 나누며 우월감을 확인하는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린슈웨이를 변태 루저로 낙인찍으며 교실 계급도를 완성하는 학생들. 이들 대부분은 학급 대장 런하오가 그은 선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비슷한 금을 열심히도 그었으리라. 조금이라도 밀려 나가면 자신도 같은 처지가 될지 모르니까.
슈퍼마켓 주인이 부랑자에게 뿌리는 물바가지에도, 같은 노숙자끼리 부리는 텃세에도, 더 약한 아이의 위로를 밀어내는 린슈웨이의 고함에도 유사한 심성이 비친다. 너를 낮춤으로 ‘정상’이고자 한다. 특별한 자격도 필요 없다. 그저 상대를 폄훼하면 그만이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효율적인 방식인가. 그 경계가 전복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 쉬운 방법엔 언제나 부작용이
단단한 논리로 서로를 구분한다 해도, 세간의 시선 앞에서 우월감은 개인의 상상에 불과하다. 언제든 ‘괴물’이라 불리는 자리로 밀려날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선이 짓밟히지 않도록 애쓴다. 회유하고 설득해서 유대감을 끈끈히 만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웃는 얼굴만으론 평생을 약속할 수 없다. 애초에 그 구분선에 인류애가 있었던 건 아니므로. 이에 가장 쉽고 빠르게 선택하는 방식이 있다. 바로, 폭력이다.
따돌림을 주도하는 런하오를 보자. 그의 괴롭힘엔 망설임이 없다. 생태계 한가운데에서 왕이 되어 진두지휘한다. 그런 강력한 위력에도 위태로움이 스치는 건 왜일까. 혹시 범죄와 매춘으로 얼룩진 가정사가 또 다른 선을 긋게 될까 두려웠던 건 아닐까. 같은 반 학생은 물론이고 봉사 대상자와 어린 괴물까지. 누구든 힘으로 누르겠다는 각오가 비친다. 나를 향한 색안경을 떠올릴 수조차 없도록.
담임 선생님 역시 폭력 만능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번뇌 가득한 학교에서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종교로 휘감았던 그녀. 그런 그녀의 고고함은 믿음이 조롱받는 순간 깨지고 만다. 단지 신앙인의 자존심만은 아닌 듯하다. 교무실의 공개된 공간에서, 훼손된 권위를 바라보는 눈초리에 반응한 것일지도 모른다. 교실의 아픔엔 한없이 방관했으면서, 본인을 위해 쉽게도 휘둘러진 손찌검. 폭력의 편의성은 곳곳에 있다.
“괴물이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이 괴물은 사실 꽤 가련한 존재입니다. 반대로, 아이들이나 선생님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그들이 무섭게 느껴질 거예요.”
- 구파도 감독 인터뷰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이빨을 드러내는 것. 약육강식의 이치는 어쩌면 가장 정직하고 공평한 논리일지 모른다. 머릿속에 그것밖에 남지 않은 몬스터라면. 하지만 인간의 폭력은 무게가 다르다. 먼길을 돌아 애를 써야 할 때도 있겠지만, 나를 지켜낼 다른 방법은 분명 있다. 세상이 이미 서로에게 날이 서 있기에, 어쩔 수 없는 방어 체계라고 하면 너무 슬프다. 결국 우리도 괴물과 같은 사고방식만 남게 되는 거니까.
식인 괴물의 잔혹함보다 ‘괴롭힘의 이유는 그냥 재미’라는 런하오의 대답이 훨씬 소름 끼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까. 나를 지킨다던 우스운 명분마저 사라진 채, 견고한 규칙이 되어버린 상하관계. 내가 차별받기도, 혹은 가해의 기로에 서 있기도 했을 기시감이 관객을 감싼다. 일그러진 정당화가 공동체로 전염되어가는 현실 역시 섬뜩하다. 편리하게 사용된 폭력에 길들어져 질문이 무력해진 세상. 그렇게 영화는 시선을 옮겨준다. 진짜 괴물의 서식지는 어디인지.
“넌 내 편이지? 언니한테 나 죽이지 말라고 말해! 난 걔들이랑 달라, 너에게 피도 먹였다고, 난 착한 사람이야!!”
- 영화 <몬몬몬 몬스터>
영화가 인간 이면의 악마성에 집중해도, 왠지 이질감이 남아있다. 우리는 성자는 아니지만, 특별히 악인도 아니잖나. 삶에서 가능한 상식적이고 도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거늘. 저들의 사악함에 선을 그어본다. 난 인간성이 존재한다고. 폭력에 잡아먹히지 않는다고. 이에 영화는 굳건한 성역에 의심 한 방울을 떨어뜨리기로 한다. ‘우리’라고 여기는 린슈웨이를 통해.
공감과 양심. 약자를 향한 시선. 같은 공포가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그의 마음은, 관객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 린슈웨이가 괴물을 고문하는 아이들을 방관한다. 커다란 그의 눈망울은 관객의 윤리관에 파면을 일으킨다. 지옥에서 잠시 숨을 돌린 표정이라 비난하기도 어렵다. 죄책감의 몸부림이 안쓰럽다. 문제는 괴롭힘에 돌아서는 발길이 점점 쉬워진다는 것. 폭력이 당연하고 익숙해져 버린 그의 교실처럼.
린슈웨이를 최대한 이해하고 싶기도 하다. 그래야 나 역시 겪었을 딜레마가 흉측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영화는 그 믿음을 조용히 흔든다. 자기 피를 괴물에게 먹여주는 게 정말 호의일까. 최약체가 계속 살아 있어 줘야 하는 잔혹한 진실은 아닐까. 적극성의 정도와는 상관없다. 폭력으로 유지되는 경계는 결코 해답이 될 수 없다. 함께 살 다른 방법을 떠올리려 하지 않게 되므로.
# 현실은 더욱 기이하기에
약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잔인할 정도로 부조리하다.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것뿐인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가 비난으로 돌아온다. 어쩌면 뜯어먹을 심산으로 발톱을 세우는 태도가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세상은 나쁜 놈이 더 잘 자는 것 같거든.
그렇지만 좌절에서 이야기를 멈출 순 없지. 영화는 한 인물을 통해 아주 작지만, 분명한 균열을 만들고자 한다. 바로 교실 창밖의 소녀다.
“이 영화에는 너무 많은 절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줄기라도 희망 같은 것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 소녀는 영화 안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캐릭터죠.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 구파도 감독 인터뷰
린슈웨이에게 다가와 위로를 건네는 소녀. 그녀는 정작 창밖에 책상을 두고 수업을 듣는, 린슈웨이보다 더 보호받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약자다. 그런데도 타인의 고통을 어루만진다. 모두가 선을 긋고 낙인찍는 공간에서, 아무런 조건도 없이 경계를 허무는 선택. 영화는 그 용기를 소중하게 담는다.
낙오자의 모가지만 바라보는 세상에서, 약자의 연대는 혹이 하나 늘어나는 일일지 모른다. 어설픈 선의는 공격의 대상이 된다. 한데 먹이사슬 최하단의 그녀가 손을 내밀다니. 영화에나 등장할 판타지 영웅 아닌가. 비현실적인 온기에 고개를 저어보는데, 감독은 작품활동에 큰 영향을 준 한 문장을 전하며 그런 의심을 다독인다.
“현실이 소설보다 기이한 이유는, 소설은 있을 만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Truth is stranger than fiction, but it is because Fiction is obliged to stick to possibilities; Truth isn't.
- 마크 트웨인, 『적도를 따라서』, 1897
어떤 제약도 없이 극적인 일이 일어나는 현실과 달리, 소설은 개연성이 꼭 필요하다는 작법론. 뒤집어 생각하면, 이곳에선 설명 불가능한 희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기이하니까.
창밖의 소녀가 어디선가 알아서 나타나진 않을 일이다. 수많은 경계선이 촘촘하게 미로를 만들어 놓았기에, 찾아가는 와중에 지쳐버릴지도 모르지. 서로를 밀어내는 폭력이 계속된다면 더더욱 멀어질 이야기다. 그렇다면 우선 다름의 담장을 조금만 낮춰 보는 건 어떨까. 그 너머에 괴물이 아닌 다정한 응원군이 있을지 모르지 않나. 나의 민낯도 조금은 드러내야 할 테지만, 그 덕에 나 역시 몬스터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
아무쪼록 담장 안에 맛있는 응원 많이 차려놓을 테니까, 부디 제 약점은 편식 부탁드려요.
# 영화는 폭력과 배제의 우화를 그리지만 기본적으론 괴수 공포 영화다. 기괴한 몬스터의 모습과 살인 능력, 그리고 유혈낭자한 액션을 스타일리쉬하게 담아낸다. 특히 복수를 다짐하는 언니 괴물이, 학생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학살하는 장면은 슬프도록 끔찍하다. 그 중에서도 학생 버스를 습격하는 장면에선 유일하게 목소리를 내어 동생을 부르는데, 이때 흘러나오는 서정적인 음악이 절묘하다. 바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
여성 보컬의 목소리로 리메이크되어 나지막히 속삭이는 이 노래. 아이들의 비명과 괴물의 울분이 섞이며 영화의 어긋난 감정을 더욱 극대화한다. 후회도 있지만 당당히 나의 길을 걸어왔다는 가사를 들으면 인생의 무게가 느껴지는데, 왠지 그 결과가 차별과 고통인것만 같은 아이러니가 엿보인다.
고독과 소외 그리고 폭력의 쳇바퀴. 이 지독한 반복을 끊어내려면, 마이웨이의 교차로에서 서로 신호등을 잘 지키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한문철 선생님 도와주세요.
https://youtu.be/qQzdAsjWGPg?list=RDqQzdAsjWG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