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검사보 벤야민 에스포지토. 이젠 흉악범죄에서 벗어나 편안한 노후를 즐기는 인생 2막일까 싶지만, 자다 일어나 “Temo(두렵다)”라고 메모장에 흘겨 쓸 정도로 어딘가 불안정한 모습이다. 그래서 그는 지난날을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편의 소설을 쓰려 한다. 소재는 바로, 유독 기억 저 멀리에 남아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25년 전 강간살인 사건. 개운치 않게 종료된 사건이 마치 자신의 인생과 닮아있다 느낀 걸까. 소설을 마무리하면 뚫려있는 자신의 마음도 자연히 봉합되리라 기대하는 걸까. 벤야민은 자신의 기억을 쫓으며 그날의 진상을 차분히 써 내려간다. 희생자의 남편이었던 모랄레스와 주정뱅이 검사실 동료 산도발, 그리고 사랑했지만 다가갈 수 없었던 신입검사 이리네까지. 한 발짝 물러서서 작가의 마음으로 그날을 대하니, 그제야 비로소 벤야민의 눈에 비친다. 빈칸이 즐비했던 그의 인생을 문장으로 채워줄 작은 힌트가.
# 찝찝함의 인생학
우리나라에는 아침을 함께 맞이한 사람들끼리 전하는 독특한 안부 문화가 있다. ‘잘 잤어?’ ‘안녕히 주무셨어요?’ 등, 간밤의 잠자리에 주목하며 과거를 확인하는 인사. ‘좋은 아침!’이란 말로 현재를 북돋는 타국의 인사와는 사뭇 다르다. 따지고 보면 명확한 대답을 바란 톤도 아니면서, 개인적 수면 생활을 콕 집어 물으니 요상하긴 하다.
허나 생각 없이 쓰는 관용어엔 오랜 역사가 묻어있는 법. 꿈자리에 괜한 기운을 느끼는 한국인 정신을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혹시나 밤사이 뒤척이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묻어있고, 오늘의 에너지가 충전됐을까 하는 기대도 담겨있는 문안 인사. 어젯밤은 서로의 활력을 점검하는 가장 편리한 기준인 셈이다. 만약 뒤숭숭하다면 분명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니.
‘행복은 자려고 누웠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는 것’ 어느 유명인이 정의한 행복론처럼, 우리는 신경 쓸 일 하나 없는 편안한 상태를 꿈꾼다. 계속이고 떠오르는 잡념이야말로 단잠을 방해하는 제1의 요소니까. 영화 <엘 시크레토: 비밀의 눈동자>(이하 엘 시크레토)의 벤야민 역시 정확히 무엇인진 모르지만 해결되지 않은 응어리에 잠을 설친다. 마음속 평화를 위한 방법으로 그날의 진실을 정리해 보고자 노력하는 벤야민. 헌데 그의 머릿속은 ‘두렵다(Temo)’는 단어만 맴돌며, 찢어버린 노트 조각들처럼 헝클어진다. 글머리의 주인공이 매번 다른 사람인 걸 보면, 쓰고자 하는 핵심도 헷갈리는 모습이다. 도움을 얻을까 하고 찾아간 옛사랑 앞에서마저 “50번 넘게 시도했지만, 다섯 줄을 못 넘기는 게 문제”라며 한탄하는 벤야민. 자신을 건드리는 껄끄러운 마음은 알아챘더라도,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하면 과거에 매인 채 스스로 갉아먹는 걸까. 그러니 불편함은 그냥 접어두고, 모르는 척 열어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삶의 지혜일까.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이토록 막혀버린 문장이라면 집어치울 법도 한데, 50번이 넘도록 물고 늘어지는 벤야민의 집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에라 모르겠다고 눈을 감다가도, 희한하게 책상 앞에 다시 앉아있는 걸 보면 참 기이하다. 어쩌면 우리를 움직이는 건 대의도 신념도 아닐지 모른다. 저 깊숙한 곳에 가만히 앉아서 괴롭히는 찝찝함에 비하면.
# 모르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
영화 <엘 시크레토>의 감독 후안 호세 캄파넬라는 관객이 스릴러에 빠져드는 이유를 바탕으로 벤야민의 집착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불명확한 미스터리를 마주한 관객은 생략된 이야기를 잇고자 열정을 보이고, 주인공과 함께 진상을 알아내려 노력하며, 퍼즐이 맞춰진 순간 개운함을 느낀다’는 것. 즉 관객이 내용을 따라가게 하는 힘은, 서사의 빈칸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하물며 온몸으로 살아낸 내 인생에 의문이 남는다면, 단순히 이어 붙이는 것으로 갈음될 리 없지 않겠는가. 분명 나름의 맺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벤야민은 어떻게든 글을 써내려고 노력한다. 타자기의 A 버튼이 망가진 바람에, 빈칸마다 일일이 손으로 빠진 글자를 써넣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이겨내면서까지.
한편 영화는 벤야민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와, 소설로 표현되는 기억 속 과거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구멍 난 인생을 필사적으로 메꾸려는 인물을 한 명 더 등장시킨다. 바로 피해자의 남편, 모랄레스다. 이유도 범인도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 하나 없이, 허망하게 아내가 지워진 그의 인생. 조용히 흘러가듯 살았을 그에게, 불현듯 가혹한 빈칸이 생겨버렸다. 그것도 믿었던 시스템으로부터 생긴 터라 마음의 구멍은 훨씬 더 컸으리라. 모랄레스도 분명한 맺음이 필요했고, 침묵하는 사법기관을 대신해 사력을 다해 움직인다. 범인이 혹시나 지나갈지 모를 기차역에 매일같이 앉아 “내게 남은 게 아내에 대한 기억인지, 기억 속의 기억인지, 이젠 잘 모르겠다”고 울부짖기에 이를 때까지.
이처럼 우리는 현재의 개운한 삶을 위해 과거의 빈칸을 채우려고 애를 쓴다. 저돌적이든 돌아가든, 이상적이든 현실적이든, 각자의 방법으로 가슴을 턱 막고 있는 찝찝함을 걷어내려 한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되면 얼마나 좋을까. 고치지도 않고 묵혀놓은 타자기라 그런지, 머릿속 문장을 열심히 찍어내도 벤야민의 원고에는 알파벳 ‘A’가 절대 묻어나지 않는걸. 관계자들은 사건을 외면하고 정치는 상식을 벗어나 있어서, 아무리 외쳐도 모랄레스의 인생에 ‘정의’가 나타나질 않는걸. 그러니 책을 쓰기 위한 벤야민의 공조 요청에, “좋은 소설이 나올 것”이라 응원하면서도 “뒤돌아보는 건 내 관할이 아니다”라며 손을 잡아주지 않는 이리네를 마냥 나무랄 수가 없다. 빈칸이 만들어낸 열정은 새로운 빈칸에 좌절하기도 하니까.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낙일(落日)>에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자신에게 벌어졌던 비극을 넘어서기 위해 끝없이 취재하는 영화감독 하세베. 반대로 그녀를 돕는 시나리오 작가 마히로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덮고 살아간다. “진실을 알게 되면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느냐”며 괴로움을 토로하는 마히로. 그 시절 기차를 타고 떠난 벤야민의 마음처럼, 한 발짝 물러선 오늘날 이리네의 응원처럼, 그녀의 외면은 나름의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하세베는 그런 마히로에게 벤야민과 모랄레스의 집념과도 닮아있는 자신의 의지를 전한다. “모르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물론 묻어두는 게 좋을 그 당시의 순간은 존재한다. 그러나 나를 뒤흔든 사건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알고, 나의 언어로 승화시킬 때 진정한 극복이 찾아온단 뜻일 터다. 벤야민이 집요하게 집필에 매달리려 하는 힘도 여기에 있으리라. 해석이 어렵던 인생의 문맥을 이해하고 나아가게 하는, 나만의 납득의 시간이니까. 마치 하세베의 영화처럼, 그리고 마히로의 극본처럼.
# 눈은 답을 알고 있다
영화 <엘 시크레토>의 감독 캄파넬라가 이 영화의 원작 소설 <The secret in their eyes>에 빠져들었던 이유도 이 연장선에 있다. 미스터리의 장르적 쫄깃함보다, 자신의 삶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주인공에게 더욱 매료됐다던 캄파넬라 감독. 그는 벤야민이 단순한 과거의 해소를 넘어, 고민의 시작점을 끝없이 찾는 캐릭터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런 감독의 애정이 우리에게 전해진 걸까. 오랜 시간 묻고 또 물어서 내린 벤야민의 해답이 사뭇 묵직하게 들린다. “과거는 잊으라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인생”이라는 고백.
혹자는 앞을 보고 걸어가기도 바쁜 시대에 뒤를 돌아보며 의미를 찾으려는 행동을 어리석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 <엘 시크레토>에 따르면 그 시선은, 단지 과거에 머문 미련한 몸짓이 아니라 오늘을 이해하기 위한 특별한 단서라 말한다. ‘빠진 곳’은 누구에게나 보이지만, ‘빠진 것’을 특정하는 건 오직 나뿐이니까. 즉 그토록 찾아 헤맨 찝찝함의 이유는 바깥의 논리에 있는 게 아니라,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지금의 눈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방향을 잃어 답답한 길 위에 놓여있다면, 가만히 내 마음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있는지 살펴보자. 그저 성가시기만 했던 벤야민의 ‘A’처럼, 인생의 빈칸을 채워 줄 나만의 한 글자가 별안간 떠오를지 모르니까.
* 글에서 인용한 소설 <낙일>의 내용은, 국내 발간이 안된 책이기 때문에 드라마 <미나토 가나에 낙일>의 대사를 참고했습니다.
* 캄파넬라 감독은 한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때 영화의 템포와 주제가 여전히 같은 에너지에 있도록 연출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제작 당시 푹 빠져있던 베토벤 소나타 14번 3악장 <월광소나타>가 도움이 됐다고 하는데, 인터뷰를 듣고나니 긴박하면서도 쓸쓸하면서도 느낌이 영화에 참 많이 담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