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달 May 05. 2024

[나의 사소한 슬픔] 살아져서 살고 있는 중입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딸과 함께 사는 작가 욜리. 그녀는 마음처럼 써지지 않는 차기작과, 이혼을 앞둔 가정생활에 회색빛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반면에 자신과 달리 다정한 남편과 피아니스트로서의 성공한 커리어를 지닌 언니 엘프리다. 자주 연락하진 않지만, 언니와 통화를 하고 나면 왠지 부족한 내가 도드라진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게 완벽한 언니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미 수년 전 자살 미수의 경력이 있는 언니. 욜리는 엘프리다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면서, 그 옛날 아버지 역시 자살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정작 죽고 싶지만 버티고 있는 건 자신인데, 왜 엉뚱한 사람들이 죽고 싶어서 이 난리를 치는 걸까. 고향에 잠시 머무는 시간 동안 욜리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속을 마주하려 한다. 엘프리다가 끊임없이 외쳤어도 듣지 못했던, 그리고 자신도 있는 그대로 흘려내지 못했던 사소한 슬픔을.



# 눈 떠보니 인생이 주어졌다

당연한 사실 1: 달성하기 어려울수록 애틋함의 크기는 커진다. 들인 시간과 노력 때문에라도, 손에 쥔 성취가 행여나 깨질세라 애지중지하게 된다. 심지어 몇억 분의 일을 뚫고 완성된 결과물이라면, 그 기쁨은 상상의 범위를 뛰어넘는다.

당연한 사실 2: 한정된 자원일수록 소중함의 크기는 커진다. 특히 살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재화라면, 어떻게든 사라져 가는 속도를 줄이려 애쓸 것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이면서 소멸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면, 지켜내는데 온 힘을 쏟게 된다.


위의 한 가지 사실만 들어도 노심초사할 일인데, 두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교집합이 있다면 우리는 감당할 수 있을까. 정중히 거절하고 싶은 이 무게. 헌데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이미 짊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태생 자체가 기적이면서 동시에 유한한 운명을 향하는 존재, ‘생명’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안전을 위협받을 때 두려워하고, 타인의 목숨을 경시하는 태도에 분노하며, 사라진 생기에 가슴 아파한다. 특히 자신의 선택으로 차가워진 몸을 마주할 때면 안타까움이 더욱 솟구친다.


영화 <나의 사소한 슬픔>에 등장하는 두 사건(아버지의 자살과 언니 엘프리다의 자살 시도) 역시 이 생각부터 떠오르게 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괴롭혔길래 이처럼 소중한 목숨을 놓으려 했을까.'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이는 망가진 율리의 자동차를 놓고 집으로 걸어가야 할 때, “왜 이렇게 모두들 죽으려고 하지?”라던 엄마의 애꿎은 농담에도 묻어난다. 힘을 더 내지 못해 멈춰버린 한계를 바라만 봐야 하는 슬픔이.


그러나 반대로 생명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자. 어려운 확률로 인간의 형상이 되어 등장했다고는 하나, 당시의 노력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어느 날 펑하고 숨이 트였던 것일 뿐. 게다가 살아보겠다는 스스로의 의지도 없었다. 갑자기 살아졌고, 살아야 한다고 주문받았으며, 기회는 한 번 뿐이니 소중히 아끼라고 교육받았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은 죽음과 세금뿐이다”라는 말처럼 소멸로부터 도망갈 수조차 없다. 선택권 없이 세상에 내놓아진 건 받아들여 보겠는데, 이젠 눈앞에 놓인 인생을 걸어가야 한단다. 생명은 어이가 없다. 저기 제 입장은 어디 있죠? 제 역할은 그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걸 반복하는 것이라 들었는데요?



# 비상구를 찾았다면 필요한 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에게 흔히 하는 메시지가 있다. ‘첫 직장을 잘 구해야 한다.’ 첫 직장 이후로 직장을 옮기더라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 그 분야가 잘 맞는지 신중하게 체크하라는 말이다. 사춘기가 시작될 때 어떤 학교에서 어떤 친구를 사귀는지도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것처럼, 출발 지점은 달릴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세상에 내던져진 '생명' 역시 첫 번째 소속, 즉 원가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인생의 맨 처음을 담당하는 터라, 어찌 보면 삶의 전반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리둥절한 채 다짜고짜 떨어진 이곳이 괴로운 공간이라면 어떨까. 선택권 없이 들이밀어졌는데, 살아내야 하는 임무도 있다니.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도전에 놓인다.


“고통은 대대로 물려받는 것이다. 몸의 유연함과, 우아함과, 색맹 유전자처럼 말이다.” 영화 초반 욜리는 풀리지 않는 차기작 원고 중간에 자신의 처지를 빗댄 한 문장을 적는다. 아마도 집안 곳곳에 퍼져있는 무력감의 기원을, 왠지 아귀가 맞지 않는 일상의 이유를, 자신의 원가정에서 찾으려 한 것일 테다. 당시 아버지의 선택은 집안의 분위기를 무채색으로 만들었고, 알 수 없는 질문만 남긴 채 어두움을 아랫세대로 흘려보냈다. 그렇게 두 딸의 시작점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얼룩져 버렸다.


엘프리다는 음악으로, 욜리는 글쓰기로 상처를 꿰매 갔다. 그래도 살아보고자 나름 생명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셈이다. 허나 출발선은 지워지지 않는 꼬리표일까. '자신을 낳은 걸 후회하느냐'라고 묻는 딸의 눈빛엔 욜리의 불행이 고스란히 전해져 있고, 아버지의 눈빛을 닮은 엘프리다는 결국 두 번째 실패를 경험한다. 고통은 유전자에 이미 새겨졌기에 정말 판을 뒤집을 힘은 정말 없는 걸까. 시작이 엉망이었다면 결말은 우리의 손을 영영 떠난 걸까. 삶의 싱그러움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듯 “죽음을 우리처럼 그냥 기다리라” 외치는 욜리의 허무한 절규만이 방법일 걸까.



이때 영화 <나의 사소한 슬픔>은 해소되지 않는 자매의 감정 사이로, 예술가들이 자신의 비극을 드러냈던 작품들을 들려준다.


나날들을 와 있을까
우리가 사는 나날들
나날들은 매번 우리를 깨우고
우리는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나날들 없이 우리는 어디서 살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답하려고 하면
긴 코트를 입은 성직자와 의사가
들판너머에서 달려온다

필립 라칸, 시  <나날들>


숨, 꿈, 적막,
눈에 보이지 않는 차분함
넌 이겨낼 것이다

발레리, 시  <잠자는 여인>


우리 시대는 비극적이기 때문에 아무도 비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재앙은 이미 일어났고 우리는 그 폐허에서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서 작은 희망을 품는다. 이는 힘든 일이다. 미래로 향하는 순탄한 길은 더는 없다. 몇 개의 하늘이 무너져도 우리는 살아야만 한다.

D. H. 로렌스, 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


집필 당시의 고민과 고뇌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문장들. 욜리와 엘프리다는 글귀를 되뇌며 자신의 의지를 붙잡거나 서로를 이해하는 힌트를 얻는다. 여기까지만 해도 등장한 작품들은 욜리와 엘프리다의 감정을 해소케 하는 충분한 장치가 된다. 그런데 꽁꽁 싸맸던 마음을 적극적(혹은 공격적)으로 열어 보이는 자매의 모습을 보면, 이들을 움직이게 한건 단순히 명대사의 감동만이 아닌 듯 하단 말이지.


'알렉산드로 솔제니친(러시아의 소설가) 만큼 용기를 가져야 한다'라고 말하는 엄마의 농담. '토마스 아퀴나스(이탈리아의 신학자)할 거냐는 말은 용서해 주겠냐는 뜻'이라는 욜리와의 대화. 작가에 주목하는 가풍을 미루어보면, 자매의 작품 인용은 단순한 문장 너머 작가의 태도까지 확장한 것일지 모른다. 절망에 혼자 빠져있지 않기 위해 깊숙한 곳의 감정을 단어 화해서 꺼내놓은 작가들의 모습. 욜리와 엘프리다는 작품활동이야말로 단순한 직업적 예술행위가 아닌, 내밀한 고뇌를 해소하는 작가들만의 탈출구임을 알아챈 게 아닐까. 그렇게 두 사람은 이놈의 집구석에서 홀로 삭혀왔던 이야기를 꺼낼 용기가 생긴다.



그러나 쏟아내는 작품도 독자가 있어야 완성되듯, 허공에 쏘아댄 혼자만의 해소는 절반의 치유렸다. 엘프리다는 욜리가 쓰고 있는 소설도 이와같은 아쉬운 발버둥임을 알았던 걸까. 내용은 알려줄 수 없고 첫 알파벳만 알려주는 욜리에게, 지금껏 쓴 글 중 제일 괜찮은 것 같다며 응원하는 엘프리다. 그녀의 마음은, 폐쇄적인 메노나이트(Mennonite) 교단을 떠나려던 그녀를 장로들이 막아섰던 어린 시절, 엘프리다를 지지하던 엄마의 고기 저미는 망치 소리와도 닮아있다. 동네에 도서관을 세우기 위해 이웃의 서명을 밤새 받으러 다녔던, 그런 아버지를 기억하는 욜리의 눈물과도 닮아있다. 어마어마한 반응과 지지선언은 아닐지 몰라도, 쏟아낸 나의 행동을 알아주는 사소한 감정의 흐름. 고통은 대물림이라며 어쩌지 못하는 인생의 한복판을 속상해했지만, 돌이켜보면 탈출구를 찾는 순간마다 자신 있게 열도록 서로가 뒤에 서 있어 주었다. 생명은 그렇게 함께 지켜져 왔다. 이처럼 이번에도 엘프리다는 욜리를 기다린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내 뒤에 서 있어 달라고. 마지막 비상구 앞에서.


# 문명은 너와 나를 잇겠다는 약속에서

 “영화 <나의 사소한 슬픔>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고 배우지 않았던 대화를 대면하게 한다” 욜리 역을 맡은 배우 앨리슨 필은 인터뷰를 통해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관계의 기술을 털어놓는다. 정신을 놓아버릴 만큼 뻥 뚫린 마음을 드러내는 것,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아픔을 털어놓는 것. 누구의 잘못도 아닌 현재를 함께 공유해야, 서로의 선택을 이해하는 시작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대화는 쉽지 않다. 인터뷰 내용 그대로 익숙하지 않고 해본적 없는 대화법이다. 당신의 탈출법을 전적으로 응원해 줄 순 있지만, 그럼에도 내 방식과 다르니 브레이크가 걸리기도 한다. 그래서 입을 다물게 되고, 결국 절망의 끝에서 외치던 SOS는 내 귓가에만 맴돌게 되기에 이른다는 것. 결국 생난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작가들의 태도 위에 불편한 소통방식을 직면하는 의지를 더하니, 두 사람의 마음 끝자락에 있었던 말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피투성이인 서로의 속살을 확인한 날에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게 있긴 한건지 의심까지 들었었던 서로의 세계가.


중국의 한 철학자는 ‘한 사람은 하나의 세계’라고 말했다. 눈 떠보니 숨을 쉬고 등 떠밀려 인생을 걸어간대도, 생명은 그 자체로 무한한 깊이가 있다고 하니 왠지 쑥스럽기만 하다.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 미리암 테이스도 '인간은 하나의 문명이다'라며 비슷한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에 한가지 덕목을 조건으로 내민다. 바로 욜리가 엘프리다를 향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연결’이다. 이 삶에 존재하고, 현재에 존재하면서, 연결된 우리가 서로의 뒤에 서 있자는 약속.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각자의 방법으로 외치고 그 소리를 소중하게 들어주면, 얼렁뚱땅 등장한 생명의 위태로움이 비로소 의연한 방향성을 얻게된다는 게 아닐까. 그 연결의 믿음에서부터 슬픔은 사소해지나 보다. 욜리의 말대로 “삶이 거대한 똥 더미일지라도”




# 이 영화에는 인용한 책 뿐만아니라 다양한 책들이 등장한다. 작가와 감독 모두 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고 활용을 잘하는게 아주 부러워. 적절한 인용이야말로 설득의 기술이며 허세의 완성인데, 애초에 읽은 책도 적지만 그조차도 기억이 안나면 원. 한참 멀었다 멀었어.



작가의 이전글 [엘 시크레토] 해답은 내가 이미 알고 있었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