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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뜬구름 Dec 25. 2016

민주의 실현; 수동적 우민에서 벗어나다.

숨어있는 쪽지

 대한민국 헌법 제 1장 총강, 제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 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내의 수많은 방송매체, 도서, 강연에서 숱하게 인용된 헌법 제 1조의 내용이다. 국가에 대한 국민의 주권과 국가 권력의 중심을 오직 ‘국민’으로서 정의하고, 민주주의의 기틀을 굳건히 하는데 헌법 제 1조는 그 소임을 다한다. 이에 따라 국민의 주권이 정부 권력에 의해 침해된다고 고려될 때, 정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로서 헌법 제 1조는 어김없이 사용된다. 즉, 헌법으로서 정부 권력의 무분별한 비대를 견제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의도이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의 균형적인 명맥을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국가체제에 대한 선도를 위하여 앞으로도 계속 되어야할 과제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핵심이 국민임을 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저 정부에 대한 견제와 비판에 머무르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그와 더불어, 국민들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정치참여와 관심이 반드시 이행되어야만 한다. 정부가 아무리 좋은 정책을 제시한다하더라도, 그에 대한 국민의 반응이 수반되지 않으면 전혀 무의미하다. 국민은 ‘민주(民主)’의 의미를 되새기고, 이 나라가 민주공화국임을 직시해야 한다. 국민이 항상 눈과 귀를 열어놓고, 손과 발을 바쁘게 하는 국가에서는 정부의 부정부패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정부에 대한 견제와 비판을 하기 전에, 국민 스스로가 국가의 주인임을 깨닫고,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자하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대한민국 국민들은 진정 민주를 실천하는 국가의 주인인가? 아니면 국가와 정치에 무관심하여, 정부의 부정과 공직자들의 권력 남용을 방치하는 어리석은 국민, ‘우민’인가? 사실 이렇다 할 기준이 없으므로, 둘 중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허나 필자는 감히 ‘우민’을 택하고자 한다. 이 나라의 국민들을 우민으로 치부하는 것은, 정치에 대한 능동적 자세가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능동적 국민’이다. 능동적 국민은 항상 국가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며, 정부의 잘못을 몸소 지적하고 개선하고자 한다. 그들은 정부의 정책이나 권력의 술수에 놀아나는 법이 없고, 따라서 국가의 흐름은 그들이 합의한 정의에 따른다. 결과적으로 국가의 모든 대소사에 국민들의 의사가 전적으로 반영되고, 정부는 그 과정에서 중립적인 매개를 이행할 뿐이다. 국민이 국가의 머리가 되고, 정부는 국가의 손발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은 그렇지 못하다. 이 나라의 국민들은 국가의 머리가 되기는커녕, 손발이 되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국가가 정부와 재계에 의해 철저히 지배되는데도, 국민은 그것을 견제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순응하고, 심지어 의존한다. ‘수동적 국민’의 전형이다. 수동적 국민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최악의 요소이다. 그것은 정부의 부패나 개인의 독재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회악일 것이다. 그 이유는 개선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에 문제가 있을 시에는 현 정부를 타도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면 될 일이다. 그것은 대내외적 협조가 충분히 가능하고, 그만큼 개선의 여지와 방법도 다양하다. 그러나 수동적 국민의 문제는 그 심각성을 느끼기가 여간 어렵다. 그것은 숨어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러한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한다. 즉, 문제점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만 문제 해결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는 문제 자체가 난해한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숨어있는 문제일 것이다. 가령 지금 당신의 책상 위에 노트 한 권이 펼쳐져 있다고 해보자. 당신은 책상 앞에 앉아 그 노트를 보고 있다. 펼쳐져 있는 노트에는 역사적인 수학 난제로 손꼽히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책상의 구석 작은 틈 속에는 구겨진 쪽지 하나가 버려져있는데, 그 쪽지에는 ‘2+5는 무엇인가?’라고 적혀있다. 물론 당신은 그 쪽지의 존재를 전혀 모른다. 잘 보이지도 않는 틈 속에 쪽지가 버려져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분명 앞으로도 평생 모를 것이다. 자, 그렇다면 노트에 적혀있는 페르마의 정리와 쪽지에 적힌 ‘2+5’ 중 무엇이 더 해결 가능성이 높은가? 문제 자체의 난이도는 비교가 무색할 만큼 페르마의 정리가 훨씬 높지만,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은 쪽지의 산수문제가 훨씬 희박하다. 아니, 가능성 자체가 없다. 문제가 있는지조차 모를 터이니, 아무리 쉬운 문제라 할지라도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그에 비해, 아무리 어렵고 난해한 문제일지라도, 문제가 있음을 파악하고 해결에 대한 관심과 의지만 가진다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


 이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는 가정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현 실태를 비유하기 더 없이 적절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사정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참뜻을 저해하는 수동적 국민이며, 마치 버려진 쪽지와 같이 자신들의 수동적 자세를 자각하는 그 쉬운 일 하나조차 못하고 있다. 수동적 국민의 문제는 이처럼, 국민으로서 자신이 취하고 있는 정치적 자세를 스스로 파악한다는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적인 작업조차 이루어지지 않기에, 일말의 해결조차 전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이는 가장 고차원적이고 개선되기 어려운 정치사회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국민들은 우리들 저편에 버려진 쪽지를 찾아야만 한다. 그 쪽지에는 ‘당신은 수동적 국민이다.’라고 적혀있을 것. 그것을 본다는 것은 곧 정치적 자각의 단계이며, 이를 통해 자신의 안일했던 정치적 태도를 반성하고 능동적 국민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면 수동적 국민의 문제는 생각보다 쉽사리 해결된다. 자각이 바야흐로 해결의 실마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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