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월 Sep 29. 2023

확신을 전하는 따뜻한 위로, 뮤지컬 <인사이드 윌리엄>

겨울날의 햇살을 닮은 위로를 전한다.


2020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창작뮤지컬 부문에 선정되어 2021년 3월 초연을 올렸던 뮤지컬 '인사이드 윌리엄'이 지난 9월 12일부터 두 번째 시즌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인사이드 윌리엄’은 명작을 써야만 한다는 셰익스피어의 강박과도 같은 다짐으로 그 포문을 연다. 주변인들의 평가에 사로잡혀 작법서를 보고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고장 난 창문 때문에 들어온 바람에 온갖 원고가 섞이고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햄릿은 혼란을 겪는다. 이야기 속 인물이 의지를 갖고 주어진 흐름을 벗어나는 이야기, 우리는 이러한 설정을 많이 접한다. 웹툰 ‘어쩌다 발견한 7월’, ‘살아남은 로맨스’, 드라마 ‘W’ 등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사이드 윌리엄’도 이러한 모티프를 활용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햄릿’과 ‘로미오와 줄리엣’의 인물들이 의지를 갖게 된 것이다.


햄릿은 복수를 위해 살아왔고 줄리엣은 로미오와의 결혼을 꿈꾸었지만 그들의 삶 자체에 의구심을 느낀다. 여태 원한다고 생각한 것들을 ‘의무’라고 자각하게 되며 자신의 삶에서 괴리를 지울 수 없다. 이들은 주어진 초목표를 잃었다. 복수가 없는 햄릿, 로미오와의 결혼이 사라진 줄리엣은 더는 ‘햄릿’과 ‘줄리엣’이 아니었다. 초목표를 잃은 인물은 주어진 이야기를 이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고 우리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들의 삶을 응원했다. 누구나 알 만한 이야기를 비틀어 전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설정의 여타 이야기와는 달랐지만 ‘인사이드 윌리엄’은 그마저도 잘 풀어냈다. 명작을 비틀어 또 다른 명작을 탄생시킨 ‘인사이드 윌리엄’의 매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인사이드 윌리엄’은 이야기를 재치있고 친절하게 풀어나가는 점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인물들은 관객에게 박수를 유도한다. 마치 이머시브 공연을 관람하는 듯 또 다른 주체로서 공연에 참여하게 된다. 이처럼 ‘인사이드 윌리엄’은 제4의 벽을 허무는 연출이 특징적이다. 초목표를 잃은 줄리엣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을 때쯤 던진 물수제비 역시 제4의 벽을 허문다. 관객석 양옆의 벽에 조명을 단계적으로 쏘아 돌이 튀며 일렁이는 수면을 표현한다. 시공간의 제약이 있는 공연의 장르 특성을 창의적으로 풀어낸다. 이는 그들의 배경을 관객석까지 확장하여 공간감을 형성한다. 조명을 활용하여 공간의 제약을 친절하게 풀어나가기도 한다. 칼을 들고 사라진 줄리엣을 쫓는 햄릿의 뒤로 오른쪽 표지판에 적혀 있던 글씨가 확대되며 그가 가는 곳을 명시해준다. 이처럼 ‘인사이드 윌리엄’은 몰입할 수밖에 없도록 연출한 것이 특징이다.


‘인사이드 윌리엄’의 탁월한 공간 활용은 또 다른 부분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인물이 등퇴장하는 곳뿐만 아니라 반주자들의 위치까지 눈길을 끈다. 오케스트라 피트처럼 숨어 있는 구조가 아니다. 무대의 하수에는 피아니스트가, 상수의 위쪽으로는 바이올리니스트와 첼리스트가 위치한다. 라이브 연주 자체만으로도 극에 몰입감을 더하고 더욱 풍성한 작품을 만드는 것에 한몫하지만, 그들의 위치는 ‘인사이드 윌리엄’만의 위트를 만든다. 셰익스피어는 피아노 반주자에게 로미오의 버릇이 나빠진다며 그만 쳐주라고 말한다. 햄릿 역시 동전을 주며 반주를 연주해달라는 무언의 부탁을 건넨다. 이처럼 무대 위 배우들은 반주자와 호흡한다. 셰익스피어는 반주자에게 각각 스칼렛, 요한, 순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익숙한 배우의 이름을 연상하게 한다. 종국에는 이를 ‘스칼렛 요한 순’이라고 한 번에 붙여 부르며 극장 내 웃음소리가 가득 차게 만든다. 이처럼 ‘인사이드 윌리엄’은 관객, 공간, 반주자 등 주어진 모든 것들과 호흡하며 이야기를 완성한다.


다른 이들과 함께 소리 내어 웃던 것도 잠시,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어둠 속에 감추어야 했다. 줄리엣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닌 ‘나의 삶’을 살겠다고 말한다. 스쳐 가는 인물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셰익스피어의 말에도 햄릿은 ‘그래도 이건 내 이야기의 조각들’이라며 자신이 쓴 이야기를 찢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오늘’을 살아보겠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입김, 강요, 사회적 시선, 관념 따위의 외부 요소를 배제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간다. 그 누구도 ‘나’를 증명해줄 수는 없다.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잃고 살아가기 다반사다. 자신의 행보에 확신하지 못한다. 본인의 삶을 대체 누구에게서 증명받을 수 있을까. 그러한 사람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가 느껴진다. 본인에게 확신을 두어도 된다고,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종국에는 셰익스피어 역시 명작이 아니어도 이것이 자신이 쓰고픈 이야기라고 말한다.


과연 본인에게 혹은 미래에 대해 확신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다. 그들을 위해 진정성 있게 위로한다. 재치있는 연출로 전달받은 위로는 마치 겨울날의 햇살과 같았다. 시린 바람에 눈물이 나도 절대 곁을 떠나지 않는 따뜻함을 닮았다. ‘인사이드 윌리엄’은 다정하고 따뜻한 작품이다.




모든 인물이 성장했고 자신의 삶을 찾았다. 미래의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간다. 남들의 시선과 평가가 중심이 될 수 없다. 나의 삶은 내가 쓰는 것이다. 누구의 말마따나 잘 살았는지는 죽기 전에야 알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인사이드 윌리엄’이 전하는 따뜻한 위로에서 확신을 얻는다.






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


작가의 이전글 다정하고 특별한 이야기, '미술관에 간 바이올리니스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