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되던 순간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기억, 그리고 동생의 존재

by 주먹토끼

사람이 태어나서 기억하는 첫 기억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 나는 '언니'가 되던 순간인 것 같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에는 나만의 놀이방이 있었다. 놀이방에서 알록달록한 미끄럼틀을 타고 놀고 있는데 어느 날 엄마와 아빠가 다가와서 물었다. "주먹토끼야, 너는 동생이 갖고 싶어?" 이미 6살쯤 먹었을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응!"하고 세차게 대답했던 것 같다. 찰나의 고민이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의 한 마디로 한 순간에 동생이 생길 수 있는 걸까? 가족으로서 중대한 의사결정권을 행한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대화는 내가 태어나고 나서 내가 기억하는 첫 기억이 되었다. 한참 뒤에 알게 된 사실은 이미 동생은 엄마의 뱃속에 있었다는 것이었다는 거지만.


엄마의 배가 불뚝해지던 과정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유치원을 다니던 어느 날 엄마는 집에 없었고, 대신 할머니가 멀리 한국에서 날아와 미국에서 살고 있던 우리 집에 와서 나를 돌봤다. 역시 많은 기억은 없다. 하지만 당시 편식이 심해 밥을 잘 먹지 않았던 내게, 할머니는 부지런히 콩밥을 해서 김을 한 장씩 싸 넓은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으셨다. 나는 콩은 싫어했지만 김은 좋아했다. 오죽하면 엄마는 날 보며 "누가 김 씨 집안 아니랄까 봐"라는 볼멘소리를 하곤 했다. 그렇게 김에 돌돌 싼 콩밥을 조그만 손으로 한두 개씩 주워 먹고 지내다 보니 어느 날 엄마 아빠가 병원에서 돌아왔다. 동생과 함께.


6살의 터울이 있어서인지 나는 동생이 꽤나 귀엽다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가 동생을 안는 것처럼 나도 동생을 안아보고 싶어 떼를 쓰기도 했다. 엄마가 조심스럽게 동생을 내게 안겨주었던 첫 순간, 나는 아기가 생각보다 무겁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무거운 티를 내면 엄마아빠가 동생을 더 이상 못 안게 할까 봐 힘들지 않은 척 동생을 품에 소중히 안았다. 그리고 이 작은 생명체를 보며 언제나 동생은 나보다 작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염원이 통했을까? 나는 여전히 동생보다 크다.)


물론 내게는 어른스러운 면모도 있었지만 동생을 시기하고 부러워하던 때도 있었다. 나보다 6살이나 늦게 태어난 동생은 왠지 조금 더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보다 더 좋은 여건에서 키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종종 들 때가 있었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빠의 가난한 유학시절에 태어나 욕조 없이 세면대에서 씻겨지곤 했었는데, 동생이 태어났을 때의 사진을 보면 그만의 아기 욕조가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은 외국에서 보내 친척들에게 용돈을 초등학생 때부터 받기 시작했는데, 동생은 거의 태어나자마자 받기 시작해서 성인이 됐을 무렵에는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채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또 나는 엄마 아빠의 금전적인 지원은 최소한으로 받으려고 했던 것에 반해, 동생은 그 지원을 조금 더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6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다고는 못하겠는데.


2015년. 나는 대학생이 되어 서울을 올라왔고, 동생은 그제야 중학교에 올라갔다. 나는 좀처럼 집에 잘 내려가는 일이 없었고 동생 또한 바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동생은 기숙사형 고등학교를 진학해서 재수까지 하는 바람에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보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동생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기로 결정하면서 3년 전부터 나와 함께 자취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 동거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도 그렇고 동생도 그렇고 벌써 서로 떨어져서 산 지가 7년이 넘었다. 또 시간이 흘러 9 to 6 직장인이 된 나와 갓 대학생이 된 올빼미형 동생의 생활 패턴이 같을 리 없었다. 그래서 동거 초반에는 부딪히기도 많이 부딪혔다. 우리는 우리만의 룰을 정했다. 빨래는 동생이, 전반적인 집안 청소는 내가 맡는다. 수요일 일반쓰레기는 내가 버리고, 금요일 분리수거는 동생이 버린다. 설거지는 각자 먹은 걸 바로바로 한다. 만일 설거지거리가 그다음 사람이 부엌을 사용하기 전까지도 그대로라면, 처음 설거지거리를 만든 사람이 모든 접시를 닦아야 한다. 외박을 할 경우에는 서로 생존 신고 정도는 하자고 합의를 봤다. 그리고 유별나게 연애에 있어서 보수적인 엄마 앞에서는 우리 둘 다 싱글 여성임을 몸과 마음을 다해 연기했다. 우리는 이렇게 가까스로 적응하고 맞춰가며 살고 있다.


동생의 존재가 좋을 때도 있다. 그냥 공감과 위로가 필요한 날들이 있다. 때로는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며 서로 미친 듯이 깔깔댄다. 사랑하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펑펑 울던 날, 동생은 나와 같이 울어줬다. 우리는 같은 어미의 뱃속에서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준다. 이 동거가 끝날 언젠가, 인정하기는 싫지만 꽤나 섭섭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이 동거에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동생 몰래 다짐한다. 뭐 물론 생각보다 꽤 오랜 기간 서로의 껌딱지가 될 가능성도 다분해 보인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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