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번째로 기억이 통편집당한 이유를 회고하며 이불킥
내 한국 나이 29살. 내 인생에 큰 물음표를 가슴에 한참 지니고 있을 나이다. 샤머니즘을 크게 맹신하지는 않지만 얼마 전 큰 마음을 먹고 사주를 보러 갔다. 생년월시만 알려줘도 선생님이 줄줄 내 성향과 직업군을 읊었다.
선생님이 나긋나긋하게 나열한 내 성향은 이랬다:
현실주의자. 실용적. 현실수용적. 좋아하는 거 하면서 살자주의. 합리적. 분석적. 이성적. 정보저장적. 확실한 거 좋아하고. 담론을 좋아한다. 구체적인 걸 좋아하고 깐깐한 느낌이 있어 시크한 독설가라나. 그래서 남들이 논리적이지 않거나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면 무시를 할 수도. 그래서 돈도 1/n 하는 걸 좋아하고 짠순이 기질이 있다. 경우와 숫자에 밝아서 돈 개념이 정확한 편. 다만 삘 꽂히면 내 취미를 위해서는 돈을 와장창 쓰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흠.. 생년월시라는 정보만 제공한 것 치고는 꽤 잘 들어맞는 것 같다. 사실 날 이성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사회생활을 하고 나서는 부쩍 내가 꽤나 이성적인 면모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꽤나 짠순이 기질이 있어 대학생 초반에는 정말 그야말로 짠하게 다닐 때도 많았다. 오죽하면 엄마가 나한테 서운해했을 정도. 그래도 돈을 벌기 시작한 요즘에는 이걸 좀 베풀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전보다는 나아진 것 같다.
하여간 선생님에 따르면 이렇게 합리적이고 경우에도 밝은 내가, 며칠 전 회식 뒤풀이 장소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필름이 끊겼다. 인생에서 두 번째로 끊긴 필름. 20대 초반에 겪었던 첫 기억 통삭제를 한 번 겪고 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아서 내 인생에 필름 끊김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자부했는데 몇 년 만에 제대로 또 실수했다. 하필 직장 뒤풀이에서 끊길 것은 또 뭐람. 중간중간 나를 애타게 부르던 목소리만 겨우 기억난다. 사실 기억을 아예 못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안 그럼 월요일에야 말로 회사에서 얼굴 못 들고 다닐 것 같으니까.
자제력 있던 내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술을 마시게 되었나 빵 반죽을 하며 생각해 봤다. (난 베이킹을 하면 어느 정도 잡념이 사라진다고 믿는 사람이다.) 우선 가장 큰 이유는 피곤했던 게 분명하다. 워낙 큰 행사를 치러 하루종일 신경이 한 곳에 쏠려있기도 했고, 정신도 없었다. 아침부터 나와서 새벽까지 일을 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두 번째는 술이 무제한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 술이 내가 좋아하는 샴페인이었다는 점쯤 되려나. 여기서 다시 짠순이 기질이 발동한 게 틀림없다. 값비싼 샴페인을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다니. 내 간 따위는 하루 정도 무리해도 좋겠다고 간의 허락도 없이 내 맘대로 생각해 버린 죄다.
그다음 날 얼마나 이불킥을 하게 되던지. 아침에 일어나서 나의 샴페인 찌꺼기가 묻은 재킷을 봤을 때는 정말 수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여간 난 무제한 술을 제공하는 곳에는 함부로 가면 안 될 것 같다. 내 안의 합리성과 짠순이가 싸우다가 짠순이가 그 싸움을 이겨버리는 날에는 곧바로 3번째 필름 삭제가 예정되어 있을게 뻔하니까. 적어도 이번 일을 겪었으니 향후 5년 정도는 이런 일이 또 없기를. 월요일에는 뻔뻔함을 살짝 장착하고 출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