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이>
감독들 저마다 본질을 찾아 헤매는 방식이 다 다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경우 내가 속해있던 기존의 세상과 다른 세상을 탐험함으로써 본질을 찾으려 했고, 피터 위어는 ‘혹시 내가 관찰 당하는 TV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아닐까’라는 의심으로부터 본질을 찾으려 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예술가들이 기존에 사용하는 여러가지 방식들과는 좀 동떨어진 방식인 ‘수학’을 가져와 본질을 찾고자 한다.
파이라는 미지의 성격을 가진 개념과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의 이치나 본질이 인간의 힘으로 알아낼 수 없는 영역이라는 지점을 합치시켜 주인공 맥스가 찾고자하는 숫자와 본질을 동일시한다. 겉보기에 맥스는 그저 말도 안되는 무언갈 찾아헤매는 미치광이 수학자 같지만, 그는 분명 세상에 존재하는 본질을 찾아내려고 고군분투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의 모습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두 손 모아 기도드리는 신자나 종교학자들과도 비슷해보인다.
맥스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어릴때 태양을 쳐다봤다가 시력을 잃었던 경험을 상기시킨다. 엄마는 태양을 쳐다보지 말라고 했었지만, 그는 기어코 두 눈으로 태양을 직면하려 했다. 그리고 그는 잠시 시력을 잃었다. 그러나 그의 무모한 도전은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을 마법과도 같이 연결해주고 모든 법칙이나 진리를 깨닫게 해줄 위대한 숫자가 있음을 알아낸다. 그것은 마치 그 스스로를 신처럼 생각하게도 만들 수 있는 전지전능한 숫자다. 맥스는 뛰어난 재능과 집착으로 그 숫자에 매달리지만, 숫자를 찾아내는 과정은 쉽지 않다. 맥스는 병적으로 시달리고(손이 떨리며 극심한 두통과 이명을 경험한다), 이상한 환영을 보며 매일 편집증 환자처럼 고통에 빠져든다.
그는 지하철 역에서 자신의 분신을 보기도 하고, 뇌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기도 한다. 숫자를 찾아 헤매는 맥스에게 모든 것은 혼란스럽고, 그 모든 것들은 원래 가졌던 논리를 상실한다.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나 모리츠 에셔의 그림처럼, 모든 것이 저마다의 법칙을 잃고 뒤섞여 있다.
흑백을 사용한 타이트한 사이즈의 샷이 주로 배치된 장면 연출은 고통에 시달리는 맥스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해줬다. 또 조명과 대비를 다소 극단적으로 사용한 것처럼 보이는데, 번지는 듯한 화면의 시각 효과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각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게다가 숫자를 원하는 사람들의 협박은 끊이질 않고, 자신을 향한 살인의지를 가진 모든 것들의 위협에서 하루라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익숙한 듯 개미가 자주 등장한다. 맥스는 개미를 볼때마다 하찮다는 듯 찔러 죽여버린다. 그러나 맥스가 화장실에서 뇌를 발견하기 전, 그는 개미를 죽이지 못한다.
전지전능한 그 숫자에 거의 다 도달했다고 생각될 무렵, 맥스는 화장실 세면대에서 뇌를 발견한다. 이것은 아마 맥스의 뇌거나 ‘인간’의 뇌일 것이다. 뇌에서는 수많은 개미들이 바글바글 기어나온다. 그리고 맥스는, 자신의 뇌를 드릴로 파괴하는 잔혹하고 생생한 시뮬레이션을 경험한다. 그 이후에 맥스는,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인 것처럼 멍해진다.
사실은 그렇다. 인간의 눈은 태양을 바라볼 수 없다. 태양 빛 근처에만 가도 눈 앞이 새하얘지며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걸 누구나 안다. 인간의 눈은 밝은 빛을 보면 잠시 시력을 상실한다. 태생적으로 인간은 태양과 마주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맥스는 태양과 마주하려했고, 시력을 잃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맥스의 그런 실수는 반복되었다.
맥스는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없는 본질의 경지에 도달하려 했고, 결국 맥스가 과거에 시력을 잃었던 것처럼 그는 자기파괴의 경지에 이르게 됐다. 그는 자신이 신이 된 것처럼 본질을 깨닫고 모든 걸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영화에서는 그를 그가 습관처럼 죽이던 개미와 동일시 한다.
그가 숫자를 연구하기 위해 자기 집에서 몰두하던 때에 집에 들어온 개미를 기분 나빠하며 죽였듯, 우주의 진리, 혹은 신이라는 존재로 통합되는 전지전능한 무언가의 입장에서 인간은 일개 개미같은 존재일 지도 모른다는 것을, 영화는 암시한다. 세면대의 뇌에서 개미들이 솟구쳤던 건 맥스가 신이 아닌 개미와 더 가까운 존재인 ‘인간’이었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결국 그는 불가능한 것에 집착하는 불온하고 미숙한, 무모하고 용기 넘치는 인간의 길을 걷기를 포기한 것 같아 보인다. 생존을 위해서.
그러나 이 영화가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그것보다는 세상의 이치가 자신의 것이라는 인간의 교만한 태도에 대한 반성에 더 가깝다고 느껴졌다. 혹은, 편집증이나 자폐증 환자들의 내면을 상상하는 과정에서 나온 하나의 그로테스크적 일기장일 지도 모르겠다(영화의 형식 역시, 잘 다듬어진 하나의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기보다는 습작이라는 인상이 좀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