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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아영 Oct 30. 2023

나의 가장 초라한 방주

영화 <홀리모터스>

<홀리 모터스>와 같은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당혹감과 난감함일 것이다.


모든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예측한 시나리오는 전부 벗어나서, 침팬지 가족과 함께 침실로 향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끝나는 이 영화를 두고, 어찌 태연할 수 있을까. 그 당혹감은 나를 영화의 첫 시작점으로 다시 돌려놓고, 훨씬 느리고 지성적인 속도로 이 영화를 되돌아보게 한다.

진짜는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궁금해지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주인공 남자는 직업부터 수상하다. ‘배우’라고 부를 법한 직업인 것 같지만, 이 한 단어로는 명확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확실한 건, 배우라고 하더라도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그런 틀에 박힌, 피상적인 정의로서의 배우는 아니다. 


남자는 늘 무언가를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고 있고, 심지어는 아주 여러 개를 연기한다. 머리가 극도로 복잡해지는 순간은 연기와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들이다. 남자가 언젠가는 진짜 현실로 돌아가겠지, 하는 기대는 매번 무너지고, 긴장감만이 지속된다. 유일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은 차 안. ‘홀리 모터스’. 

그러나 이 공간에서 남자의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볼 품 없다. 


홀리 모터스 안에 놓여 있는 이 체구 작은 남자는 분장을 벗겨내고 입길 반복할 뿐, 그 어떠한 욕망도, 기쁨도, 성취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피로함. 오로지 피로함만이 남자의 얼굴을 맴돈다. 


나는 이 피로함 뿐인 초라한 모습이 남자의 전부일 것이라 믿고 싶지 않아진다. 그럼 남자의 진짜는 어디에 있나. 남자가 문득 자신과 똑같은 남자를 발견하고 그를 총으로 쏘기 위해 갑자기 차 밖으로 뛰쳐 나갔을 때. 이때가 진짜인가? 


그러나 무언가 찜찜하다. 그 행위조차도 연기의 연속이고 가짜인 것만 같다. 그럼 딸을 만나는 그 순간. 이때가 진짜일까? 그러나 남자는 딸과 함께 하는 순간에도 철저히 기능적으로 역할을 수행한다. 마치 딸이 아빠 역할의 배우를 고용한 것처럼. 


이것들이 전부 진짜가 아니라면, 전 부인을 만난 그 순간이 진짜일까? 이 시퀀스에서 남자와 전 부인의 감정은 몹시 진실 되어보일 뿐만 아니라 가장 몰입이 된다. 그들의 대화 안에는 드디어 ‘서사’랄 것이 등장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퀀스는 가장 작위적이고 ‘극적’으로 연출되었다.


전 부인은 마치 연극 배우가 된 것처럼 텅 빈 세트장처럼 보이는 공간을 배경으로 노래를 부르며 슬픈 연기를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서사와 서로 주고 받는 감정은 마침내 이것이 ‘진짜가 아닐까’하고 의심하게 만드는데, 남자는 끝내 이 기대를 저버리고 만다.


옥상에서 떨어져 죽어버린 전 부인의 모습을 본 남자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부자연스럽게 비명을 지르고 차에 올라탄다. 대체 뭐가 진짜인지 나는 알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대부분의 영화가 시작과 끝에서 정지 상태를 유지하는 것처럼, <홀리 모터스>에도 그런 정지 상태를 기대하게 된다. 영화에서의 정지 상태는 갑자기 멈춰 서는 급정지 상태가 아니라, 가장 완성에 가까운 ‘목적지’에 도달한 정지 상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주인공은 거의 항상 진솔하고, 거의 항상 완성되어 있다. 그 말은 주인공이 대체로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가장 진짜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홀리 모터스>의 최종 정지 상태는 침팬지와 가족이 된 남자의 모습이다. 아, 감독은 끝내 엔딩에서 가장 의심스럽고 가짜 같은 장면을 만들어내버리고 말았다. 


이쯤 되어서 드는 생각, 결론은 남자가 진실되었던 모습이 홀리 모터스의 안에 있었던 때 뿐이라는 결론이다. 그 초라하고, 볼품 없고, 인생의 들러리에 불과한, 감추어야 할 것 같고, 어쩔 때는 추해보이기도 하는 그 모습이 바로 ‘진짜’라는 것이다. 


나는 남자가 거의 자신의 전부를 쏟아내면서까지 연기라는 스케줄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 이 남자가 이러한 고된 스케줄 끝에 도달하고 싶은 꿀 같은 이상향이 있다고 영화를 보는 내내 믿어왔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그런 믿음은 산산조각이 나고, 영화는 고된 스케줄의 영원한 반복의 형식으로 마무리가 된다. 


남자는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이렇게 고된 하루를 보낼 것이며, 남자의 과거 역시 이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저 똑같은 하루의 반복. 가장 진실된 모습은 텅 비어있으며, 사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삶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은 내가 역할을 연기해야 할 과제에 불과하며, 진정한 행복 같은 건 그 어디에서도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기쁨과 슬픔, 충격과 공포, 고통과 쾌락. 이 모든 것들의 반복. 이것이 삶에서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실물이다. 홀리 모터스는 그 끊임없이 반복되는 지겨운 삶의 모습을 위해 준비하는 초라한 공간에 불과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면 조금은 우울해지기 마련이다. 


레오 까락스가 이야기하는 삶이라는 정의에 따라 생각해보자면 내 삶도 그다지 큰 의미가 없어보이고, 그냥 겪어왔던 모든 것들이 반복되는 것이 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홀리 모터스라는 공간은 아주 특별하다. 가장 초라한 공간이지만 사실 가장 화려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 외형이 리무진인 것도 한 몫한다. 리무진 안에는 남자가 분장해야하는 역할의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있다. 게다가 이 모든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핵심 같은 곳이라면, ‘홀리 모터스’라는 이름이 이해가 간다.


신성한 공간, 신성한 의지, 신성한 자아, 신성한 나. 그것은 삶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남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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