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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아영 Oct 17. 2023

당신을 '사랑'해도, '용서'만큼은 할 수가 없어요

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한나를 바라보는 마이클의 눈빛. 그 눈빛은 영화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이 된다. 마이클은 한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번도 그녀를 허투루 보지 않는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영혼과 감정이 가득하다. 그 눈빛이, 마이클의 모든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해준다.

한나의 행동은 어린 마이클이 보기에 독단적이고 답답한 면이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도 훨씬 더 몰입이 되는 쪽은 마이클일 것이다. 단순히 이 영화가 마이클의 시점이어서가 아니라, 한나의 행동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사가 한 군데 빠진 것처럼 행동한다. 


그녀의 감정은 마치 완성되기 직전의 문장처럼 당혹스럽다. 


어쩔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또 다른 때에는 누구보다 순수하고 성숙한 사람처럼 보인다. 교회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마이클이 읽어주는 책의 내용을 듣고 가슴을 부여잡는 한나의 감정은 그녀라는 사람에 대한 해석을 더 미궁 속으로 빠뜨린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한나. 나치의 구성원으로 일했던 한나. 심지어는 홀로코스트에서 죽을 사람을 직접 고르기도 했던 한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는 한나의 잔혹함을 기억한다. 


그러나 법정에 선 한나는 그것이 잔혹한 행동이었다는 걸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또 순수한 얼굴을 하고 답답함을 호소한다. 법정에 있는 이들은 한나의 뻔뻔함에 분노하지만 마이클은 그런 한나의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는 건 그녀가 나빠서가 아니라 몰라서임을 알기 때문이다. 한나의 무지. 아주 오래된, 그리고 아주 순수한 그 무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마이클 뿐이었다. 그 무지는 때로 한나가 스스로를 먹여살릴 수 있게 도왔지만, 후에 한나를 극악의 범죄자로 만드는 자살 무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 무지와 한나를 떼어 놓지 않는다. 


그러나 마이클만은 그 무지의 전부가 한나가 아님을, 무지에서 벗어난 한나의 순수함을 알고 있다.

그녀가 문맹이라는 걸 세상에 밝히는 것과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 마이클은 내내 고민하다가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주기로 결심한다. 아니, 어쩌면 그건 한나를 다시 마주하기 어려웠던 마이클의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을 바꿔버릴만큼 사랑했던 사람이 끔찍한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면, 그 사람을 마주하는 것만큼 숨 막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이클의 삶에 한나가 전부라고 해도 좋을까? 


한나로부터 열리기 시작한 마이클의 여린 인생은 나치의 전범과 극악무도한 폭력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치욕으로 확장되었다가, 다시 개인의 속죄와 용서, 그리고 사랑이라는 마음으로 돌아온다. 그저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한나를 사랑하기만 했던 마이클에게 한나의 지난 죄는 마이클의 인생을 또다른 국면으로 집어넣는다. 

마이클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방관자도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하는, 그리고 이제는 그 죄를 판단하고 벌을 줘야하는 위치에 있다. 그리고 그 맞은 편에는 아무것도 몰랐을 때 미치도록 사랑했던 대상이 있다. 


마이클은 어떻게 해야만 할까. 사랑과 단죄 사이에서 마이클은 딜레마라고 표현하기 어려울만큼 괴로운 굴레에 빠진다. 마이클이 할 수 있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가 원하는 방식으로 한나를 존중해주는 것이었다.


마이클의 사랑은 숭고했다. 마이클은 한나가 무지에서 벗어나 글을 읽고, 자신의 죄를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이 되길 바랐다. 오랜 시간 그 많은 책들을 목이 아프도록 읽은 것을 녹음해 한나에게 보내는 마이클의 모습에 그 사랑이 전부 담겨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한나는 글을 깨우친다. 마이클의 목소리와 좋아하던 책의 글자를 하나하나 비교해가면서. 한나는 그렇게 감옥에서 다 늙은 할머니가 되어서야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마이클을 만난 한나의 모습은 뻔뻔해보일만큼 당당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마이클에게 던지는 말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젠 책을 읽어주지 않겠지, 하고 마이클을 바라보는 한나는 마이클에게 개인적인 용서를 구한다. 나의 죄를 너만은 용서하고, 날 사랑해줄 수 있겠니. 


그러나 마이클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도, 용서만큼은 할 수가 없어요.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한 마이클은 한나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한나의 편지에 답장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책을 더 읽어주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았지만, 그녀를 데리러 오기로, 그녀의 이후의 삶을 도와주기로 약속한다.

한나의 마지막 선택은 한나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글을 읽을 줄 알게 된, 그래서 책을 읽을 줄 알게 된 지성인이 자신의 잘못을 오롯이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잘못이 씻을 수 없는 잘못이고, 또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가 도달할 수 있는 곳은 길이 없는 막힌 벽 뿐이었다. 그녀가 죄를 저지른 순간부터 그녀의 삶은 그렇게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까지도 한나를 사랑했던 마이클의 그 마음이 오래도록 남는다. 죄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사랑을, 마이클에게서 본 것 같다. 


한나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새겨두려는 그의 행동은 ‘인간적인 인간’이라는 게 뭔지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한나를 기억하는 마이클의 남은 생이, 괴롭지 않고 평온하기를 바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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