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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 Oct 16. 2020

슬럼프일까?

어떤 직장인에게든 일을 하다 보면 슬럼프, 무기력함 아님 회의 같은 게 드는 건 당연하다. 나 역시 업 & 다운을 겪으면서 10년도 훨씬 넘게 일을 하면서 살아왔고, 지금 그 슬럼프가 나에게 찾아온 것 같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 정확하게 5년 근속(?)으로 직장생활을 한 후에,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한 곳에서 1년 넘게 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일 자체는 비슷한 일이긴 했지만, 일하는 물리적 공간- 나라와 도시-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항상 바뀌어서 똑같은 일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어렵다. 그래서 매번 다른 공간과 다른 동료들에게 적응해서 일을 하는 게 힘들긴 했지만, 그 일은 끝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쉽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내 매니저가 정말 무능하면서 고집만 세고 대화가 안 되는 인간이라 한다면, 물론 그런 인간과 얼굴을 맞대고 일하는 게 괴롭긴 하지만 내가 일하기로 약속한 기간이 지나면 그 관계도 끝난다. 그래서 내가 떠나는 날이나 혹은 그가 떠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버틸 수 있었다. 다시 그런 인간을 다른 프로젝트에서 마주칠 수도 있겠지만 상종 못할 인간이라 생각되면 미리 알아보고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있으니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일 자체가 프로젝트 중심이니, 하나의 일이 끝나면 소득이 없긴 하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 쉴 수도 있었다. 그래서 7년 정도를 평균적으로 보면 8개월을 일하고 4개월은 쉬면서 여행을 하는 패턴으로 지냈다.


그리고 제네바에서 와서 일을 한 지 2년이 넘었다. 사실 어딘가에 정착해서 같은 일을 계속하면서 살 계획이 없었던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제네바에 오게 되고, 끝나는 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고용계약서를 쓰게 되었다. 일을 엄청나게 잘하지는 않지만, 잘릴만한 중대한 실수나 과오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나를 불러주는 다른 고용주도 없었기에 나는 쉬지 않고 같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1년의 5주라는 휴가가 있고, 오후 6시가 되면 깔끔하게 컴퓨터를 끄고 일에 대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적당한 업무량이어서, 그리고 원하면 뭐든 할 수 있는 제네바에 있는 직장이어서 소위 '워라밸'도 괜찮다.


하지만, 어느새 슬럼프가 스멀스멀 찾아왔다. 무엇 때문이냐고 무엇이 문제냐고 물어본다면 딱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조직의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은 욕망도 없고,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싶지도 않고, 많은 돈을 벌고 싶지도 않다. 그런 나에게는 정말 적당한 일인 것 같은데, 매일 마주치는 작은 일들이 좀 버겁다. 반복되는 일상,  반복되는 일이 좀 힘들다. 

너무나 할 말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정말 나는 할 말이 없는 경우. 누구도 나를 판단하지 않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이 없다- 나 스스로 나를 평가하게 되는 경우.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이상의 보람이나 성취감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이라는 제네바라는 도시도 한국인이자  오롯이 혼자인 나에게는 생각만큼 이상적이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생각이 들지만, 이 일은 나나 고용주가 끝내겠다는 명시적인 의사를 보이지 않는 이상 끝이 안 보인다는 그게 결정적인 원인인 것 같다. 


고작 2년을 쉬지 않고 일하고서 지친다고 불평하는 내가 열심히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부끄럽기도 하다. 그리고 수십년씩 묵묵히 그 반복되는 일이라는 일상을 버티면서 지내는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새삼 존경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왜 일을 하고, 가치를 두고 있는 게 무엇이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천천히 생각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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