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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은 백수

by 파란하늘

애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가훈을 알아 오라 했었다. 그런 것이 있나 싶어서 남편에게 물으니 대뜸 그랬다.


필요한 사람이 되자


남편이나 나의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보다는 필요한 사람이 되는 편이 훨씬 좋은 일기기도 하므로 남편의 말에 두말하지 않았고, 아이들에게도 줄곧 우리 집 가훈은 필요한 사람이 되자라고 말해왔다.

남편은 직책이 올라갈수록 일의 강도도 세져서 언젠가부터 힘들다는 말이 입버릇이 되었다. 몸은 좀 힘들어도 마음은 편했던 현장직이 아니고 몸은 편해도 마음이 불편한 관리직이라 그럴 것이다. 책임감이 커지고 그의 결정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질문이 시간과 요일에 상관없이 그를 숨 막히게 했다. 그러니 잠도 부족해지고 신경은 날카로워진다. 그런 그의 곁에서 내가 할 일은 최대한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다.


4월 초에 사량도 사무실에서 도움을 요청해 왔다. 내 후임으로 온 이가 업무 능력이 떨어져서 입사 4개월 만에 해임했다 한다. 새 직원이 출근하는데, 인수인계를 새로 해주라는 것이다. 퇴직하고 4개월이 넘어서도 간간이 사량도 사무실에서 문의 전화가 오고 있었다. 가서 제대로 마무리를 해주는 것 옳다는 생각이 들어서 승낙했다. 오랜만에 사량도 고동산 둘레길을 걷고, 사람들을 보러 갈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그런데, 그만둔 지가 언젠데 아직도 당신을 찾느냐며 남편이 불편해한다. 섬이라는 특성상 1박 2일 가야 하는데, 그는 늘 섬에서 자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당신이 가훈을 ‘필요한 사람이 되자’로 해서 그렇지, 나는 지금 거기서 꼭 필요한 사람이야” 대답했다.

그도 나도 스스로 착각하며 사는 것일 수도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 ‘필요한 사람’인 것은 맞는 것 같다. 일요일이며 늦은 밤에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그다. 책임감에 일을 하고는 있으나 이제 지치는 모양이다. 나는 왜 이러나 싶을 때마다 불평을 한다.

“그거 다 우리 집 가훈 때문인 것 같아, 필요한 사람이 되자 그거”


말이 갖는 힘이 있음을 안다. 뇌세포의 98퍼센트가 말의 지배를 받는단다. 내가 하는 말은 각인되고, 각인된 말은 행동을 유발하고 그 행동은 힘을 발휘한다.


“이 참에 가훈을 바꿔야겠네, 우정이 걸로 바꾸자, 돈 많은 백수!”


사무실에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백수의 삶이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기왕이면 돈 많은 백수이기를 꿈꾸던 아이의 말은 백수의 삶이 윤택하기 위한 어떤 행동을 유발할 것이고, 그 행동과 말이 힘을 발휘하면, 결국은 이루어질 것이다. 아이는 스스로 그녀의 삶을 위해 애쓰고 있다.

이제, 우리 부부도 자꾸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려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돈 많은 백수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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