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뭐든 될 수 있어
틀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아이들의 상상력은 기발하다. 미리 전재했지만, 그들은 아직 틀이라는 게 만들어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틀은 다양하게 부를 수 있다. 고정관념이나 프레임 또는 사물을 이해하는 잣대 뭐 그런 것들. 예전에 어린아이들이 나와서 문제를 내는 TV 프로그램 코너가 있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설명을 하면 그게 무엇인지 어른들이 맞추는 것이다. 그들의 설명은 하나같이 무릎을 칠만한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아빠가 일어서면, 엄마는 책을 봐요’
맞힐 수 있겠는가?
그림책 속의 나리는 자기가 흉내 내는 게 무엇인지 엄마에게 맞춰보라 한다. 기상천외한 몸짓을 엄마는 도저히 맞출 수가 없다. 아이는 왜 엄마가 한 개도 맞히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왜-애 엄마는 몰라?! 나리의 기분이 돼보라고!!”하며 화를 낸다.
어르신들과의 대화는 늘 오리무중이다. 딱히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단어를 유추해 말해주면, 그래 그거, 한다. 하지만, 그 단어 없이도 그들은 충분히 알아듣고 상대방의 말을 이해한다. 전라도에선 ‘거시기’로 모든 이야기가 통한다고 한다. 바디랭귀지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유는 상대방의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건 아주 간단하고 사소한 의미이며, 모두가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범주의 것이라야 한다. 그림책 주인공 나리처럼 기발한 상상력으로 이걸 맞혀보라고 요구하는 일은 허락되지 않는다.
말 안 해도 알 거라는 믿음은 이기적인 생각이다. 설령 상대방이 알더라도 잘못 이해할 여지는 충분하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뭐 먹을래?라는 물음에 ‘아무거나’라는 무책임한 답을 내놓고, 대추차에 생크림을 얹어준다면 그걸 흔쾌히 먹을 사람이 있을까?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어떤 마음인지 말을 해야 상대방이 안다. 그걸 말할 의무는 내게 있다. 상대방은 내 의도를, 내 마음을 알아내야 할 그 어떤 의무도 책임도 없다. 요구하지 말자. 그림책의 제목처럼 결과물은 뭐든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리가 동그란 모양으로 팔을 꺾고, 머리에 귤을 얹고, “엄마, 이거 주전자다” 했다면, 엄마는 아이의 상상력에 박수를 보내고 환호했을 것이다. 팔을 휘저으며 “엄마, 이건 선풍기야”했다면 엄마는 아이가 예뻐서 얼싸안고 뽀뽀를 날리며 감탄했을 것이다. 어디서 이런 천재가 나왔나 싶어서. 말을 안 하고 알아맞혀보라니까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답답하고 화가 난다.
말하면서 살자. 우리는 이미 자신만의 틀이 생겨버린 나이다. 자신의 틀에 맞추라고 상대방을 힘들게 하지 말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자.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물어보자. 상대방의 입으로 나온 말을 내 귀로 직접 들은 것에만 반응하자. 그래야 마음이 편하고, 세상이 편하다.
나이 먹어서는 간단하게 사는 것이 좋다. 복잡하게 살지 말자. 삶은 의외로 단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