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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음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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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멀 IMEOL Jun 09. 2022

역시 믿을 만한 아이

마음 일기 - 1

'역시 네가 최고야', '너밖에 없어', '이번에도 잘할 거야'와 같은 말들은 항상 나를 치켜세우는 트로피와 같았다. 보통의 트로피는 자신이 가진 전문분야에서만 그 진가를 발휘한다. 노래자랑 1등이라던가 글짓기 대회 장원과 같이 말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트로피는 나의 삶 어디에나 써먹을 수 있는 값진 것이었다. 예를 들면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자라 주는 신뢰로운 맏딸, 사고를 치기는커녕 학교의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는 전교 1등 모범생,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해내는 직원. 수 명의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신뢰를 받는다는 건 제법 달콤한 보상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그 사람들을 실망시킨다면 나는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일까? 




아버지는 사업을 하셨다. 워낙 어렸을 때의 일이라 어느 정도 규모를 가진 기업이었는지, 매출액은 어땠는지 자세한 것들은 잘 모르겠다. 어렸을 때의 일이라는 건, 그렇다. 그 시기 국내 대부분의 자영업자들이 그랬듯 아버지의 사업도 IMF로 무너졌다. 출산과 육아로 전업주부가 되었던 어머니는 직장을 구해야 했지만, 고졸 학력의 경력단절 여성이 구할 수 있는 직장은 많지 않았다. 이 또한 그 시기를 어렵게 보낸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진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적 나의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대통령이나 과학자를 꿈꾸는 여느 초등학생들과 같이 막연하게 꿈꾸던 것이었지만, 내 작은 보물이었던 피아노에 압류딱지가 붙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나는 집 안의 맏딸이었다. 10살 남짓했을 때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면서 나는 더 이상 어리광을 피울 수 없었다. 물론 그 전에도 어리광이나 애교를 부리던 살가운 딸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맞벌이를 하게 된 부모님 덕에 나에게는 내 일상을 무탈히 보내는 것 외에도 동생들의 일상 또한 그렇게 만들어주어야 하는 역할이 추가되었다. 가사 노동이라는 것이 초등학교도 졸업하기 이전인 어린이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끝에 주어지는 '역시 OO이가 최고야', 'OO이밖에 없어'라는 칭찬은 마치 경기에서 우승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금메달과 같았달까. 




나는 상담 선생님에게 내가 짊어져야 했던 책임감, 그리고 그로 인한 부담감이 얼마나 엄청났고 그것이 얼마나 억울했는지를 꽤 오랫동안 토로했다. 상담 선생님은 어느 날 '그 책임을 정말 지고 싶지가 않았어요?'라고 물으셨다. 그 책임을 다했을 때 주어지는 애정이나 인정이 나에게 트로피 같은 것이 아니었는지, 그래서 내가 그 트로피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아등바등 노력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하는 말이었다. 




나에게 인정이라는 트로피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

만약 그 트로피가 사라진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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