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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말가 May 20. 2020

착한 일 한 가지

- 에피소드 -

언제였는지도 까마득한 어느 비 오는 날,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문득 정류장 푯말 아래서 비를 맞고 있는 한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5~6학년 됐을까.

이미 어깨는 꽤 젖어있었다.

소년이 주위를 둘러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문득 그 소년이 눈에 들어왔던 것처럼 문득 내 손이 까딱까딱 그 소년을 부르고 있었다.  

소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버스 기다려?"

"네."

"몇 번?"

"7738이요."

"어, 나두 그거 탈 건데. 같이 기다리자."   

  

그 대화를 끝으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소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소년이 말 많은 아줌마를 귀찮아할 것 같기도 하고(나라면 그랬을 거다, 분명히. 아니 애초에 누가 부른다고 우산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았겠지.) 따뜻하게 이런저런 말을 거는 그런 말주변 머리도 없으니까.

 그런 내가 왜 그랬을까. 배려심 같은 거 안 키우는 사람인데, 아이들도 좋아하지 않고 여자애도 아닌 남자애에게 우산을 씌워주다니. 다른 인격체가 잠시 나온 건가?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윽고 버스가 왔고 소년이 먼저 타고 내가 뒤따라 탔다. (뭐 버스비를 내줬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난 꽤 건조한 사람이라...) 소년은 앞쪽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뒤로 가서 맨 뒷자리 바로 앞 의자에 앉았다. 우산을 같이 쓴 적 없었던 사람처럼, 본 적도 없었던 사람마냥.

사람이 많았다. 멍 때리고 있었다. 내리는 사람들이 뒷문으로 미리 나와 하차 카드를 찍는 단말기만 보고 있었다.

잠시 뒤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에 눈을 바로 뜨고 보니,

소년이었다. 뒷문 앞에 선 그 소년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내리나 보군.

....

어......, 잘생겼...었네! 


그제야 소년의 얼굴을 처음 봤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 

소년은 나에게 꾸벅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살짝 놀람)


나도 손을 얼굴 옆에 들고 안녕- 흔들어주었다.  조심히 가렴~ 그런 느낌으로.

문이 열리고 소년은 내렸다. 나는 소년이 내린 쪽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보면 뭔가 마음 쓰는 느낌일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귀찮아서.

곧이어 버스는 소년이 내린 정류장을 출발했다.     

그때부터였다.


그냥 내려도 나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텐데.

인사하고 가려고 나랑 눈 마주칠 때까지 그렇게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건가?

신기하네. 요즘 아이 같지 않아.

잘 생겼어.  

아, 우산을 그냥 빌려줄 걸 그랬나?

정류장에서 집이 가까워야 할 텐데.    

 

소년과 같이 버스에 올라 멍 때리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소년은 내 머릿속에 없었는데, 소년이 내리고 나서부터 집에 올 때까지 그 뒤로 며칠 동안 그 얼굴이 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길에서 그 소년을 만나면 못 알아볼 게 분명할테지만.

뭔가 내가 굉장히 착한 일을 한 것 같은, 한 소년에게 선한 영향력을 전한 것 같은 막연하고 미련한 뿌듯함으로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가끔 이렇게, 굉장한 미담인 듯 그때의 일을 떠올린다.

그래도 평생에 착한 일 하나는 했다는 걸 잊지 않으려는 추억 재생기.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20살은 넘었을 그 소년도 다른 어느 작은 새의 비를 잠시 가려주는 사람이 되어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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