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날의 상처
나는 예나 지금이나 비가 오는 걸 끔찍하게 싫어한다. 웬만해서는 우산이나 비옷 없이는 밖에 나가지 않고, 우산을 안 챙겼는데 비가 오면 돈을 주고라도 바로 우산을 사는 편이다. 이렇게까지 하는 건 지금도 장면 장면이 뇌리에 선연한 어린 날 한 사건 때문이다.
어느 해 비가 오는 날 집이 무너져 내렸다. 그날 나는 스레트집 단칸방 한구석에서 밥상을 펴놓고 숙제를 하고 있었다. 아마 아버지는 방 한구석에 누워 멍하니 야구 중계를 보고 있었던 듯하다. 쉬는 날이면 베개도 아닌 두루마리 휴지를 척 베고 누워 야구 중계를 보는 건 아버지의 중요한 소일거리 중 하나였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바깥에는 쉽게 그칠 거 같지 않은 폭우가 세차게 내려치고 있었다. 우르르 꽈광, 천둥·번개를 동반하면서.
그렇게 빗소리를 배경으로 숙제에 열중하다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밥상 위의 숙제를 그만 덮어버렸다. (어린이의 인내심이란 늘 그렇다.) 그러고는 “야구 그만 보고 만화나 틀어주면 안 되느냐” 아버지에게 조를 참이었다. 그 순간 텔레비전 오른쪽 위 벽이 ‘와직!’ 소리를 내며 우그러지는 게 눈에 확 들어왔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차 ‘와지직’ 소리가 나며 벽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야구 중계에 눈을 묻고 있던 아버지에게 “아빠, 저거 좀, 벽! 벽!”이라고 외쳤건만, 아버지는 내가 장난이라도 치는 줄 알았는지 “허 참 뭐~ 좀 조용해 보라”며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 사태는 더 심각해졌다. ‘와직’ ‘와지직’을 넘어 소리가 ‘우르르’로 바뀌더니 벽이 통째로 주저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가 내리치는 바깥이 훤히 드러났다. 나는 뭔가 기분이 멍해져 바깥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제야 일이 심각해진 걸 안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가위를 들고 전축이며 텔레비전이며 연결선을 마구 자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나가! 얼른 나가!”라며 바깥으로 내몰았다. 비는 오고, 러닝셔츠 차림의 아버지와 나는 생쥐같이 젖고, 집이 거기서 더 무너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처구니없는 초현실 속에 우리는 무너진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당 일을 나가 있던 어머니는 일을 파하고 돌아와서야 사태의 전말을 파악했다. 그러고는 아버지에게 “애를 데리고 먼저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냐, 대체 거기서 텔레비전 선은 왜 자르고 있었느냐”고 따졌다. 아버지는 “세간이라고 몇 있지도 않은데 그거라도 밖으로 옮겨야 할 거 같아서”라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대차게 “염병한다”며 혀를 찼다. 그리고 “염병해 버린” 아버지 대신 무너진 집을 수습하는 것까지가 온전히 어머니의 몫이 됐다. 어머니는 한여름 찜통더위 속에 아버지가 선을 마구 자른 텔레비전을 구루마에 실어 온 동네 전파사를 돌아다녀야 했다. 그리고 뻥 뚫린 집에서 그대로 잘 수는 없으니까 벽 공사를 해줄 인부도 직접 섭외했다. 아버지는 “야구 봐야 하는데 텔레비전 언제 고치느냐”고 참 철없는 소리를 했었다. 돌아보면 참 기가 막힌다. 아버지 왜 그러셨나요. 참으로 황당하고 기가 막힌 어린 날의 한 장면이다. 나는 그래서 잊을 수 없다, 비가 오고 집이 무너져내린 그날을.
그날 이후 어느새 30년이 훌쩍 지났다. 올여름도 30년 전 그날처럼 비가 참 많이 왔다. 그런데 이제는 비 때문에 무너지는 집에 살지 않는데도, 나는 여전히 비가 싫고 짜증 난다. 아마 그날의 사건이 강한 트라우마를 안겨줬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왜 이런 집에서 가난하게 살아야 하나, 어린 마음을 박박 긁었던 충격. 무너진 벽을 바라보며 생쥐같이 젖었던 마음.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도 생각한다. 벽이 내려앉는 걸 보면서, “나는 자라면 최소한 비 오면 무너지는 집에서는 살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책상에 앉곤 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내게 비는 삶의 장애물이자 약이었다. 그때 아팠지만, 그 아픔이 지금까지 버티며 살아오게 한 동력이 되어주었으니 말이다. 앞으로도 무너지지 않는 집에서 더 무너지지 않는 마음으로 살 수 있도록 어린 날 상처받은 나에게는 위로를, 앞으로 살아갈 나에게는 용기를 건네주어야겠다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