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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궤변론자 Dec 25. 2022

나의 '글' 이야기

짧지만 굵은 '글'생사, 무엇을 위해 그렇게나 '글'을 써제꼈는가?

1991년생, 32살, 남자, 가정주부.

 어찌 살다 보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자, 동글동글 귀여운 딸아이의 아빠이자, 가정의 집안살림과 육아를 책임지는 가정주부로서의 역할을 하며 살고 있다. 모종의 이유로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을 다니다가 한순간에 사직을 하고 육아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주위 사람들은 '남성 가정주부', '남성 주양육자'로서의 삶을 이야기해 보라고 추천한다. 특이하니까. 그래 맞다. 소위, '아빠육아'가 아주 성천외한 시대는 아닐지 몰라도 또 그리 흔하지도 않으니 조금 특이하다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이전에 대기업을 그만두고 살림과 육아를 위해 뛰어드는 선택을 한 내 안의 프로세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특유의 사고방식들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글 쓰는 데엔 딱히 재주도 없고, 읽는 글이라곤 주로 무협, 인터넷 잡설들, 뭔가 있어 보이는 에세이나 일반 단/장편 소설은 가끔, 아주 가아끔 읽을 이지만, 제에 꽤나 어린 시절부터 글을 고 싶은 욕심이 줄곧 어왔다.  나의 성과 없는 글쓰기의 역사는 부끄럽지만 제법 길다. 중학교 시절 친구의 추천으로 판타지 소설을 접한 나는 그 방대하고 화려한 세계관에 깊게 매료되었다. 세 서양을 배경으로 하는 마법과 기사의 세계,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무협의 세계, 그리고 미래 현대를 배경으로 한 가상현실 게임 세계들. 내가 학창 시절 처해있던 빠듯한 현실을 잠시간 잊기에는 충분히 매력적인 별천지 세계들이었다. 그 당시 친구들이 즐겨 읽던 판타지 소설들은 만화책방에서 빌려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권 대여에 500원이었던 타지 ㅌ소설책을 수권씩 빌려볼 만큼 우리 집은 여유롭지 못했다. 나는 어찌저찌 어렵게 돈을 구해 만화책방에서 빌려보기도 했고, 돈이 너무 아까워서 학교 도서관, 지역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판타지 소설을 빌려 탐독하기도 했다. 그 시절 나에게 소설책 한 권 한 권은 부담스러운 행복이었다. 한 권, 한 터, 한 문단, 한 줄 굉장히 소중했고 동시에 아쉬웠다. 책은 읽는 만큼 끝나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지금도 글 읽는 속도가 지독히도 느리다. 책을 천천히 곱씹어가며 읽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귀중한 소설책의 한 줄, 한 단어를 세하게 상상하고 음미고, 특별히 재미있는 장면은 다시 돌아가 재차 읽었다. 옆자리 친구는 한창 유행던 속독법을 배우기 위해 속독 학원에 다닌다고 할 때, 나는 누구보다 느리게, 천천히 아끼고 아끼며 읽는 법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 순간 드디어 도서관 공짜 책 모두 읽고, 신작 소설 또한 도저히 돈이 없어 빌려 읽기 어려진 때 다가왔다. 그때 내가 한번 직접 판타지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적으로는 흔해 빠진 설정 몇 줄과 나름대로의 프롤로그 한 두 페이지 가량 끄적여 보다가 도저히 깜량이 안되어 포기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번째 글쓰기 도전했던 시기는 대학 학한 직후 어느 날이었다. 그 당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책 시리즈에 푹 빠져 있었다. 베르베르의 시리즈 소설들을 즐기고 있는 시점, 불현듯 흥미로운 설정 하나가 떠올랐다. 특히 좋아했던 '개미'라는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공상과학 소설이었다. 큰 존재가 작은 존재를 장난으로 괴롭히다 죽이고, 또 그 존재가 그보다 더 큰 존재에게 괴롭힘을 받다 죽는, 그런 저런 내용이었다. 호기롭게 집필을 시작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다양한 인물들을 설정하고 사건과 플롯을 구성하여 초안을 작성했다. 몇 번의 퇴고를 거치면서 세부적인 스토리를 잡아갔다. 조금씩 풍성한, 워드 50페이지가 넘어가는 단편 소설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내 첫 작품이었던 그 제목도 없는 소설을 나는 사랑했고 애정했다. 대학 강의를 들으며 투잡, 쓰리잡을 뛰던 나에게 알바가 없는 날 짬짬이 내  소설을 다시 읽고 수정하는 것이 당시 유일한 취미였고 놀거리였다. 7~8번을 퇴고했을 때였을까, 여지없이 잠깐 짬이나 인천 구월동 도서관 디지털 자료실에 들렸다.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원고에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생각나서였다. 여유시간이 얼마 없었고, 조금 다급하게 수정하고 저장 버튼을 눌렀다. 무언가를 잘못 눌렀고, '아차!'하는 순간 원고를 통째로 날려먹게 되었다. 텅 비어버린 워드 파일을 보면서 처음엔 눈을 의심했고, 다음엔 꿈일 거라며 현실을 부정했고, 종국엔 섣부르게 서두르며 미친 짓거리를 저지르고, 백업하나 해두지 않았던 병신 같은 나 스스로를 원망했다. 며칠을 앓고 앓다가 '한 번 써본 이야기 또 못쓰랴'라는 생각으로 다시 시작도 해봤다. 그러나 더 이상 재미있지도 흥미가 돋지도 않았다. 더는 글이 써지지 않았다. 그렇게 뜬금없이 호기롭게 시작했던 집필의 꿈은 시작만큼 뜬금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좌절스러운 경험에도 불구하고 집필에 대한 시도는 지지부진하게나마 조금씩 계속되었더랬다. 연극 동아리를 하며 시나리오 집필에 열을 내었던 적도 있었고, 그냥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장에 흩뜨려 놓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본격적으로 다시 한번 집필의 꿈이 불타오르던 시기가 있었으니 29살이 되던 해, 바로 결혼 직전이었다. 아내와의 결혼 준비 과정은 그리 쉽지 않았다. 서로 간의 문제라기보다는 집과 집의 문제 때문이었다. 특히 가진 것이라곤 빚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1원의 가치도 없는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 집이 문제였다. 나와 아내는 서로 각자의 집에 절연을 외쳐대면서 까지 힘들게 결혼을 추진했고 결국 바라던 바를 이루게 되었다. 결과는 좋았지만 상처는 남았다. 나는 나를 믿고 그 모진 과정을 버티고 견뎌준, 상처 입은 아내에게 조금은 특별한 청혼을 하고 싶었다. 라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결심하고, 나라는 인간이 어떻게 정립되었으며, 그간의 과정 속에서 무궁하게 느낀 내 감사와 사랑을 적은 책을 선물는 것이었다. 원대한 계획은... 슬프지만 당연하게도 계획으로 그치게 되었다. 예상치 못하게 한층 바빠진 회사 일과 생각보다 바빴던 결혼 준비를 핑계로 기한을 맞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는 청혼을 해야 했으니까...(결국은 손으로 쓴 작은 미니 앨범 책자 정도로 청혼을 하게 되었다...) 아직도 1쳅터에서 2쳅터로 넘어가던 그 청혼기는 나의 네이버 클라우드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지금, 내 삶이 요동치고 있는 요즘, 다시 한번 집필에 대한 욕구가 솟는다. 글로 쓰고 싶은 다양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떠오른다. 지맞닥뜨린 여성의 임신, 출산, 그리고 육아의 현실. 즉, 고전적인 여성상과 남성상에 대한 세상의 인식과 요구. 그 요구에 대항하고 싶어지는 심이 입을 근질거리게 만든다.(직장을 그만두고 육아 전선에 뛰어든 육아 대디로서의 이야기 차후 올려보고 싶다.) 그러고 생각해 보니  집필에 대한 욕구 줄곧 반항심에 의한 것이 아니었 싶다. 이 없어 원하는 판타지 소설을 읽을 수가 없을 때, 빌어먹을 세상이 럽고 치사해서 내가 직접 써보고자 했다. 대학교 진학과 동시에 투•쓰리잡을 뛰며 그토록 원하던 돈벌이를 시작했을 때, 선명히 보이기 시작한 동기들과의 출발점 차이에 은근한 분노를 느꼈고 단편소설 영감이 떠올랐다. 결혼 준비를 하며 가족들에게 돈 한 푼 요구도,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한 스푼 응원정도는 기대한 내가 배신당한 때, 다시 한번 집필의 욕구가 불타올랐더랬다.


 다지 유복한 가정환경이 아니었던 나는 늘 세상 인식과 싸우는 기분으로 살아왔다. 일찍이 엄마가 돌아가셨기에 편부 가정 바라보는 세상의 인식과 싸워야 했다. 애석하게도 아버지의 사업은 줄곧 잘 풀리지 않 여유롭지 못한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기에 가난을 바라보는 세상의 인식과도 싸워야 했다. 중고등학교 교복은 졸업생들이 남긴 옷을 입었고, 급식비 지원을 못 받은 분기엔 급식 도둑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내 상황이 어렵다 뿐이지 부끄러워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되려 한벌에 100만원 씩이나 주고 교복을 사 입는 놈들을 병신들이라 조롱하고 비웃는 식이었다.(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시절 소위, 고급 교복 브랜드의 1년치 교복값이 100만원이 훌쩍 넘었었다.) 나는 편부가정인 나를 스스로 가엾이 여기지 않았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고, 내가 가진 사연 또한 그렇고 그런 사연이라고 여겼다. 엄마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는 '엄마는 내가 10살이 되던 해에 죽었다'라고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되려 그게 뭐 별거냐고 물었다. 세상 인식에 대한 반심 때문이었다. 그다지 세상과 타협하며 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인생을 살수록 마음에 거슬리는 세상 잣대들이 늘었다. 더불어 세상에 내뱉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았다.


 32세, 결혼 후, 누구나 다 알만한 대기업에서 퇴사하고 살림과 육아전선에 뛰어들었다. 스스로 삶의 노선을 정하고 내 인생에 대한 주관이 생긴 뒤에야 조금이나마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계속해서 키보드를 잡았었는지 감이 왔다. 이제 다시 키보드를 들었다. 자칭 지독한 현실주의자이며 공상가이기도 하고 늘 세상과 대립하는 반항가이기도 한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나만의 '글'로 소개하고자 한다. 세상 인식에 대한 나만의 소견을 본격적으로 쏟아내 보고자 한다.


네이버 클라우드를 뒤지다 찾은 스무살이 되던 해 찍은 셀카. 왜 저러고 찍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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