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두 축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할 일 목록을 떠올리고, 하루 종일 이것저것을 해치우며, 저녁이 되면 오늘 무엇을 했는지를 되짚어본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생산적"이기를, "성취"하기를, 끊임없이 "doing"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삶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다. 바로 "being", 존재 그 자체의 영역이다.
Doing은 가시적이다. 우리가 만든 결과물, 완수한 프로젝트, 획득한 학위, 올린 게시물. 이 모든 것은 측정 가능하고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다. 반면 being은 비가시적이다. 고요히 앉아 차를 마시는 순간, 아무 생각 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는 그 자체의 경험. 이것은 측정할 수 없고, SNS에 올리기도 애매하며, 성과표에 기록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doing에만 몰두하다 보면 스스로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갇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외면하게 된다. 직장인, 학생, 부모, 창작자... 이런 역할들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다. 모든 역할을 벗어던졌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여전히 존재하는 그 무엇이 진정한 우리다.
역설적이게도, being은 더 나은 doing의 토대가 된다. 번아웃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쉬지 않고 달렸지만, 정작 자신이 왜 달리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Being의 시간, 즉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느끼고 받아들인 사람은 더 의미 있는 일을 한다. 그들의 doing은 불안이나 외부의 압력이 아닌, 내면의 진정성에서 우러나온다.
동양 철학은 오래전부터 이를 알았다. 노자의 무위(無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인위적인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의 명상 수행 역시 doing을 멈추고 순수한 being의 상태로 돌아가는 연습이다. 서양에서도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대인이 존재의 의미를 망각했다고 경고했다.
삶은 being과 doing의 균형이다. 우리는 세상에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며, 그것은 자연스러운 욕구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다. 아무것도 성취하지 않은 날에도,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은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 존재 자체가 기적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둘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일할 때는 온전히 일하고, 쉴 때는 온전히 쉬는 것. Doing할 때는 최선을 다하되, 그것이 나의 가치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 Being의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고요함 속에서 자신을 재발견하는 것.
결국 삶의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오늘 무엇을 했는가?"와 동시에 "나는 오늘 어떻게 존재했는가?" 두 질문 모두에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