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어라. 담아라. 보여라.
# 명분 없이 거리를 찍는다는 것
스트릿 포토그래퍼들은 종종 명분을 요구받는다. 왜 낯선 사람을 찍느냐고, 무슨 메시지를 담으려는 거냐고.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타츠오 스즈키나 모리야마 다이도 같은 거장들의 사진을 볼 때, 우리는 명분을 먼저 묻지 않는다. 전후 일본의 상실감이든, 하층민의 삶이든 그런 맥락은 나중에 알게 된다.
먼저 오는 건 사진 자체의 힘이다. 거리가 있고, 순간이 있고, 압도적인 느낌이 있다.
그런데 무명의 작가가 비슷한 사진을 찍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왜 이런 걸 찍었나?" "무슨 의도인가?" 사진보다 명분을 먼저 요구받는다. 그리고 거장들과 비교 받고 그냥 따라하기 정도의 평가를 받는다.
거장들은 사진이 먼저 받아들여지고 명분은 나중에 따라오지만, 신인은 명분을 먼저 증명해야 사진이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작품 세계와의 결정적인 차이다. 권위의 문제일 수도, 축적된 맥락의 문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중 잣대가 존재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다.
하지만 명분과 작업 방식은 다르다.
나는 거리를 담고 싶다. 아무도 보지 않을 그 순간을 기록하고 싶다.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명분은 "왜 찍느냐"에 대한 사회적 정당화지만, 작업 자체는 그보다 먼저 존재한다. 거리와의 조우, 순간에 대한 반응, 셔터를 누르고 싶다는 순수한 욕구 - 이것들은 설명이 필요 없다.
모리야마 다이도의 사진은 흐릿하고 거칠지만,
거리를 느끼게 만든다. 명분 이전에 체험이 먼저다. 거리의 날것 그대로의 에너지, 존재 자체, 순간 자체, 이것이 다이도의 사진이고, 이것이 내가 담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명분을 따지고 작업 방식을 비난하는 것은 틀렸다. 거리는 공공 공간이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순간들을 포착하는 것은 사진가의 정당한 작업이다.
윤리적 선을 지키면서 거리를 담는 것,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순간을 기록하는 것,
이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필요한 건 명분이 아니라 계속 찍는 것이다. 사진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당신만의 언어가 드러날 것이다. 혹은 평생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쁘지않다.
중요한 건 거리가 당신을 부르고,
당신이 응답한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재고 따지고 하지말고
찍어라. 담아라. 보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