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데이즈
- 우울함과 인생의 단일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을때 관람하면 좋은 영화
- 대학원 시절의 영화 분석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
영화를 분석하는 수업 시간.
전공 필수라 교수님의 어려운 수업 진행 방식에도 학생들을 무조건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영화광이라면 광인 사람이었는데, 처음 보거나 정말 구하기 힘든 고전 영화를 가져와서 수업을 하시던가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 영화를 공수해서 수업을 하시곤 하셨다.
그 수업으로 당시 한국에서는 생소했던 제일란 감독을 알게 된 건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나톨리아" 가 바로 그 영화였다.
시를 읽으며 풍경화를 보는 듯한 익스트림 롱샷의 앵글은 얼마나 인간이 나약한지 잘 보여주고, 사각의 프레임 안 속에서의 인물들의 삶을 관조하듯이 잘 그려내는 감독이었다.
굉장히 지루한 영화지만 아나톨리아를 인간에 비유해서 보면 이해가 가는 영화였다.
이 감독의 우작과 기후는 꼭 보면 좋을 영화로 추천하고 싶다.
교수님은 꼭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영화를 멈추고는 질문을 하셨었는데, 대부분 학생들은 곤란한 표정을 많이 짓곤 했었다.
감독의 숨겨진 연출 의도와 미장센의 목적을 가르치려는 교수님은 학생들과 대화를 하며 수업을 진행하고 싶었던 거 같다.
그때 나는 영사기사를 하며 주경야독을 하던 때였기 때문에 더욱더 그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지곤 했었다.
대학원은 대부분 연구비를 받거나, 장학금이 있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영상대학원은 그런 제도가 없다는 게 궁금해서 장학재단에 전화를 해서 왜 영상대학원은 장학금이 없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장학재단의 조금 높은 분의 상담 결론은 "좋아서 하시는 거잖아요"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럼 당신이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그냥 봉사활동으로 만든건가? 라고 말해 주려다 그냥 참았다.
그래서 영사기사로 다른 이들의 영화를 틀어 주며 번 돈으로 영화 공부를 하는 입장이라 더 열심히 하고 싶어 졌었다.
어느 맑은 봄날, 교수님이 내게 처음으로 질문을 하셨다.
영화 전체가 인물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진행하는 특이한 영화였다.
원래 인물이 카메라를 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물이 관객을 쳐다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벽 즉, 제4의 벽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되면 극이 깨지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런 장면들은 흔해졌지만 교수님이 보여주신 영화는 흑백 영화였고 꽤나 오래된 영화였다.
그런 장면을 멈추시고는 이 의도가 뭘까? 하고 나에게 물으셨다.
그래도 없는 듯이 살아서 질문을 안 받을 수도 있겠다 라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1학기 말에 결국 걸려 버렸다.
그래도 열심히 대답을 했다.
"소격효과를 주려고 한 것 같아요. 마치 관객이 거울을 보는듯한 느낌을 주면서 인물들에게 몰입을 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 아닐까요?" 교수님은 말씀이 없으셨고 꽤나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셨다.
이후에 나는 1,2,3 학기 내내 독보적으로 교수님께 질문 세례를 받았다.
거의 교수님과 둘이 대화를 하며 3시간을 보낸 것 같은 시간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며 전혀 칭찬 같지 않는 이상한 칭찬을 나에게 해주기도 했다.
본인들이 질문을 받았으면 아찔 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래도 그 수업 시간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배운 것도 많고 프레임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배웠던 중요한 수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업 시간에 못 그리는 그림 솜씨로 콘티를 참 많이 끄적인 게 그 시간이 유일했던 것 같다.
교수님은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갑자기 통보식으로 나에게 다음 주에 네가 수업 한번 진행해 봐라 하셨다.
네?
교수님께 달려가 "헤헤 아.. 이건 좀.." 했었지만, 교수님은 나가 버리셨다.
교수님께 개인적으로 연락을 드려 그러면 제대로 해보고 싶으니 3주만 시간을 달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나는 영사실에서 다른 감독들의 영화를 또 열심히 틀며 수업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수님께 참 감사한 일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그 수업 시간에 진행했던 구스 반산트의 "라스트 데이즈" 에 대한 내용들을 적어 보려고 한다. (그냥 말로 진행 하는 방식이라 두서가 없다.)
영화를 다 보시고 이 글을 읽으시는 게 좋습니다.
영화를 보시면서 글을 읽으시면 더 좋습니다.
라스트데이즈는 고인이 된 너바나의 커트코베인의 마지막 날을 그린 영화.
영화에서 주목해야 될 점은 이 영화는 커트코베인의 영화이기도 하면서 아닌 영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될 수 있는 인물” 이 주인공인 블레이크입니다
주인공이 머무는 공간에 대해선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공간은 매우 크지만 공허하다. 그리고 완벽한 모양새를 갖춘 집은 아니다. 블레이크의 공간이 완벽한 형태를 갖추지 않은 이유는, 블레이크의 삶 자체가 불안정적이라는 것의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 구스 반 산트
감독이 이야기는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통용됩니다
“나는 그들이 정말 자신들이 원하던 위치에 올라섰을 때, 그리고 정말 원하던 것을 성취했을 때 느끼는 허탈감, 실망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무리 유명해져도, 돈을 많이 벌게 되어도, 그들을 도와주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실망감, 분노, 그리고 우울함, 이것은 모두 유명세로 인해 치르는 것들이다. 사람들은 쉽게, “뭐가 고민이야? 잘 돌아가고 있잖아.”라고 말하지만 그런 말들은 그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 구스 반 산트
라스트 데이즈의 시나리오는 불과 30장 정도의 분량밖에 안 됩니다.
이유는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미장센으로 그리고 구도를 나누는 영리함으로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하드보일드 영화입니다.
극 중에 흘러나오는 'Venus in the Fur' 음악의 정서는 이 영화를 잘 말해 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iobySgFP2s
몽환적이면서도 관능적인 분위기, 최면적, 에로틱한 분위기.
프레임
영화에서는 프레임을 나누는 영리한 구도를 많이 보여주는데 그중 하나가 텔레비전이 나오는 장면에서 텔레비전 안에서 태권도는 하는 여자와 남자 + 창문밖 + 텔레비전을 보는 인물.
이렇게 세 개의 프레임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태권도 장면은 원래는 없을, 여자와 남자가 대회에서 태권도 겨루기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창이 계속해서 프레임에 걸리는데 의도적으로 프레임을 쪼개서 사용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차 안에서의 모든 씬들은 롱테이크고, 관객이 알 수 없는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 답답함은 영화를 보며 자연스레 어항 속에 갇힌 사람들을 연상하게 됩니다.
롱테이크와 줌 아웃, 달리샷을 잘 이용한 이 영화는 블레이크의 심리 상태를 카메라로 잘 말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NwQmTh9MZ0
기타 줄이 끊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부르는 절규의 연출이 가장 마음에 드는 씬.
이 노래는 마이클피드가 활동했던 파고다에서 불렀던 노래.
사운드
영화를 보다 보면 계속해서 쓸데없는 소리가 영화에 진입을 하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구스반산트는 프레임 밖에서 오는 소리를 만들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 의도는 아무런 이유 없이 들리는 소리들과 의미 없는 소리들로 불안한 블레이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구스반산트의 당시 음악에 대한 생각이 나오는 씬은 텔레비전에서 보이즈투맨이 나오는 장면입니다. 흑인 가수임에도 불구하고 가스펠 방식의 노래를 부르면서 (남성성을 중요시하던 기존의 흑인가수와는 달리) 유니섹슈얼리티한 콘셉트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블레이크는 자신의 공연에 대한 환멸감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감독은 이런 보이즈투맨의 유니섹슈얼이 대중에게 설득이 되는 건지 궁금해하는 것 같습니다. 조롱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 영화는 시간이 엉켜 있습니다. 편집의 시간도 엉켜 있어서 블레이크가 갔다 온 폭포의 소리가 계속 나기도 하고, 나중에 나올 노래에 대해 먼저 플레이되기도 합니다.
블레이크와 나눴던 대화를 다시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반복되는 씬을 다시 집어넣기도 합니다.
연기
영화에서 내내 중얼중얼거리며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걷고 있는 블레이크.
마치 원시인 마냥 숲을 거닐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들 사이를 걷는 이미 죽은 이의 발걸음은 어떨까 생각이 드는 연기. 블레이크는 아마 이미 죽어 있는 상태라고 보면 연기를 보는 게 편해집니다.
블레이크의 사냥꾼 코스프레는 남성성을 상징하는 걸로 보입니다.
그러다 여성 성을 상징하는 몸짓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혼란하기만 한 장면들은 죽기 전의 정체성의 혼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성정체성이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이건 간에 죽을 사람은 이미 그것이 중요할리가 없으니 다 풀린 눈으로 돌아다니는 블레이크를 카메라는 따라다닙니다.
내가 여자면 어땠을까?
내가 남자면 어땠을까?
죽음 앞에서는 어찌 보면 모든 행동에 예측이 불가합니다.
블레이크의 행동에서 계속해서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은 다른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것에 대한 욕망, 내일이 없는 사람이면 할법한 행동을 대사 없이 계속해서 몽환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원씬 원컷이 많은 이 영화는 마치 그 한 공간에서 연기를 하는 연극배우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한정된 공간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 연극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우리들의 일상에서도 가끔 느껴지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제와 똑같은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블레이크 자신만은 평범한 하루를 보낼 수가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가득 차 있는 블레이크는 평범한 내일이 없어 무기력하기만 합니다
캐스팅
캐스팅을 하는 방법 역시 독특합니다. 주로 구스 반산트 감독은 비전문 연기자를 쓰는 캐스팅 방식을 사용하는데, 영화 내에서 옐로우 페이지의 영업사원 역을 맡은 테디우스 토마스는 구스 반 산트가 실제로 만났던 옐로우 페이지의 영업사원이기도 합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은 기존 배우들의 틀에 박힌 연기톤보다는 비전문 배우가 카메라 앞에 섰을 때 오는 생경함과, 기계적인 연기에 가려지지 않은 그들의 꾸밈없는 모습을 포착하는 연기 연출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마지막의 장면은 천국의 계단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에 동의하며, 얼마나 이 인물에 애정을 가지고 영화를 연출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상상에 의존했다. 우리 역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에 관한 이야기들 외에 다른 정보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았다. 작업을 하는 동안 포틀랜드의 누군가를 통해서 커트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나는 그저 블레이크라는 존재를 만들었고 그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 지에 관한 것에 집중하고 싶었다. " - 구스반산트
여담이지만 감독의 친구인 리버피닉스를 보내고 만든 영화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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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 그는 자신의 집 온실에서 끝내 엽총에 머리를 겨누었고 홀(Hole)의 멤버인 부인 커트니 러브와 딸 프랜시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커트코베인의 유언장
To Boddah
Speaking from the tongue of an experienced simpleton who obviously would rather be an emasculated, infantile complain-ee.
This note should be pretty easy to understand.
All the warnings from the punk rock 101 courses over the years, since my first introduction to the, shall we say, ethics involved with independence and the embracement of your community has proven to be very true.
I haven’t felt the excitement of listening to as well as creating music along with really writing for too many years now.
I feel guilty beyond words about these things.
For example, when we’re backstage and the lights go out and the manic roar of the crowd begins, it doesn’t affect me the way it did for Freddie Mercury, who seemed to love and relish the love and adoration from the crowd, which is something I totally admire and envy.
The fact is, I can’t fool you, any one of you.
It simply isn’t fair to you or me.
The worst crime I can think of would be to con people by faking it and pretending as if I’m having 100% fun.
Sometimes I feel as if I should have a punch-in time clock before I walk out on stage.
I’ve tried everything within my power to appreciate it (and I do, God, believe me, I do, but it’s not enough).
I appreciate the fact that I and we have affected and entertained a lot of people.
I must be one of those narcissists who only appreciate things when they’re gone.
I’m too sensitive.
I need to be slightly numb in order to regain the enthusiasm I once had as a child.
On our last 3 tours, I’ve had a much better appreciation for all the people I’ve known personally and as fans of our music, but I still can’t get over the frustration, the guilt and empathy I have for everyone.
There’s good in all of us and I think I simply love people too much, so much that it makes me feel too fucking sad.
The sad little, sensitive, unappreciative, Pisces, Jesus man!
Why don’t you just enjoy it? I don’t know!
I have a goddess of a wife who sweats ambition and empathy and a daughter who reminds me too much of what I used to be, full of love and joy, kissing every person she meets because everyone is good and will do her no harm.
And that terrifies me to the point where I can barely function.
I can’t stand the thought of Frances becoming the miserable, self-destructive, death rocker that I’ve become.
I have it good, very good, and I’m grateful.
But since the age of seven, I’ve become hateful towards all humans in general.
Only because it seems so easy for people to get along and have empathy.
Only because I love and feel sorry for people too much, I guess.
Thank you all from the pit of my burning, nauseous stomach for your letters and concern during the past years.
I’m too much of an erratic, moody baby!
I don’t have the passion anymore, and so remember, 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
Peace, love, empathy.
Kurt Cobain
Frances and Courtney, I’ll be at your altar.
Please keep going, Courtney, for Frances.
For her life, which will be so much happier without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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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ddah 에게
경험 많은 바보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나는 차라리 거세당한 어린아이 같은 불평꾼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글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독립성과 공동체 의식을 받아들이는 것의 윤리에 대해 배운 이후,
지난 수년간 펑크 록 101 수업에서 들었던 모든 경고들은 결국 사실로 드러났다.
나는 더 이상 음악을 듣고, 만들고, 글을 쓰는 것에 대한 흥분을 느낄 수 없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죄책감을 느낀다.
예를 들면, 우리가 무대 뒤에 있고, 조명이 꺼지고, 관객들의 열광적인 함성이 시작될 때,
그것이 프레디 머큐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는 관객들의 사랑과 찬사를 즐기고 기뻐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런 그를 존경하고 부러워한다.
사실은, 나는 여러분을 속일 수 없다.
그것은 여러분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불공평한 일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범죄는, 가짜로 즐기는 척하며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가끔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출퇴근용 타임카드라도 찍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이 모든 것에 감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정말로 감사한다, 신이여 믿어달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우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그들을 즐겁게 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그러나 나는 아마도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가치를 깨닫는 나르시시스트일 것이다.
나는 너무 예민하다.
어린 시절의 열정을 되찾기 위해선 약간 무뎌질 필요가 있다.
지난 세 번의 투어 동안 나는 우리가 만난 모든 팬들과 사람들에게 더 깊은 감사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이 모든 좌절감과 죄책감, 그리고 타인을 향한 공감을 극복할 수 없다.
우리 모두에게는 선한 면이 있다.
나는 아마도 사람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슬픈 것 같다.
이 작은, 예민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물고기자리 예수 같은 인간아!
그냥 즐기면 안 되겠냐고? 모르겠다!
내 아내는 야망과 공감으로 가득 찬 여신이다.
내 딸은 내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입맞춤을 하며, 모두가 선하고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공포에 빠뜨린다.
나는 프랜시스가 나처럼 비참하고 자기 파괴적인 데스 록커가 될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나는 가진 것이 많고, 아주 많으며, 그것에 감사한다.
하지만 일곱 살 때부터 나는 인간 전체에 대한 혐오감을 품기 시작했다.
나는 단지 사람들이 서로 공감하며 잘 지내는 것이 너무 쉬워 보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내가 사람들을 너무 사랑하고, 너무 안타깝게 여기는 것 때문일까?
지난 몇 년 동안 나에게 보내준 편지들과 걱정에 대해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하지만 나는 너무 변덕스럽고 감정 기복이 심한 어린아이 일 뿐이다.
나는 더 이상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기억하라.
불타는 것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 낫다.
평화, 사랑, 공감.
커트 코베인
프랜시스와 코트니, 나는 너희의 제단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코트니, 프랜시스를 위해 계속 살아가 줘.
나 없이 그녀는 훨씬 더 행복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