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가득한 개인 기록용 감상문
2025.01.15.
‘노스페라투’. 익히 호러 영화의 클래식이라고 알려진 작품이다. 이런 클래식이 어떤 방식으로든 리메이크가 된다고 하면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선다. 우리는 유명 작품을 리메이크란 이름 아래 망친 경우를 수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리메이크든, 속편이든 실망이 너무 많았다. 작년 개봉한 ‘듄’을 제외하면—‘듄’은 여기에 포함시키기는 억지지만— 개인적으론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감독과 출연진을 보고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러 영화를 잘 보지 못하지만, 꼭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스토리는 고전답게 스토리가 복잡하진 않다. 미지의 존재에 고통 받는 여인—헬렌이 있고, 그를 괴롭히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헬렌을 차지하기 위해 하수인 크녹을 이용해 헬렌의 남편, 토마스를 미지의 존재—올록 백작이 있는 성으로 보내버린다. 토마스가 떠난 뒤로 헬렌의 이상 증세는 심해진다. 토마스는 올록 백작에게 속아 아내를 금화 한 주머니에 팔아버리는 계약을 하게 되고, 올록 백작은 헬렌을 차지하기 위해 위스버그로 온다. 그 사이 저주에 걸린 토마스는 죽을 뻔하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위스버그로 돌아온다. 올록 백작은 헬렌을 차지하기 위해 위스버그에 역병을 풀고, 헬렌을 따스하게 대해준 애나 하딩과 그 아이들이 죽는다. 아내와 두 딸을 잃은 프리드리히 하딩도 결국 전염병에 감염되어 죽는다. 토마스는 폰 프란츠 교수와 지버트 박사와 함께 올록 백작을 처단하기로 한다. 하지만 올록 백작을 죽이는 건 헬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결국 헬렌의 희생으로 올록 백작의 저주와 역병은 사라진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감탄한 것이 몇 가지 있다.
제일 먼저 연출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이 ‘라이트 하우스’ 때부터 빛과 그림자를 잘 사용한다고 생각했는데, ‘노스페라투’에서는 그 장점을 마음껏 선보인다. 고딕 호러를 내세운 ‘노스페라투’에 아주 찰떡이다. (고딕 호러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에서 시작된 고딕 문학에서 기원한 서브 장르라고 한다). 예고편에서도 나오는데, 올록 백작의 손 그림자가 위스버그를 가로지르는 장면은 많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 역병이 어떤 식으로 퍼지고, 그 위험성을 인물의 입을 빌려 얘기하는 것보다 이런 장면 하나가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올록 백작의 신비함과 저주를 표현하다보니 밤 장면이 많은데, 빛과 그림자 연출로 표현해서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 대비 효과가 아주 좋다.
장면 전환 연출도 좋았다. 아무래도 올록 백작이 멀리 있고, 그 거리감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데 자연스러운 장면 전환으로 뚝뚝 끊기지 않았다. 인물의 옆모습을 훑으면서 다른 사람을 보여준다던가 위로 처리한 시선을 따라 장소 전환을 한다던가. 이것이 이 인물이 누구를 생각하는지. 이 인물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관객이 알아차리도록 했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니콜라스 홀트, 애런 존슨은 말할 것도 없다. 두 배우가 나오는 영화는 영화 자체는 재미 없을 수 있지만 연기에서는 실망한 적이 없었다. 거기에 윌렘 대포가 맡은 프란츠 교수는 말이 안 나온다.
윌렘 대포는 샘 레이미 스파이더맨에서 그린 고블린으로 유명한데, 리메이크한 ‘노 웨이 홈’에서도 표정 연기가 말이 안 된다. 선인과 악인을 오가는 그 미묘한 선을 고무줄 뛰기처럼 자기 마음대로 넘나드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연기력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연기력 때문에 극의 긴장감과 관객의 상상력을 키워주었다.
‘노스페라투’가 뱀파이어 영화의 고전인 만큼 해석할 여지가 많을 것이다. 인물의 행동을 아주 조금만 틀면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텐데, 이걸 명배우들의 명연기가 합쳐지니 그 뒷이야기를 어떻게 상상해야 할지 보는 내내 즐거우면서 마음을 졸였다. ‘노스페라투’ 내용을 모르기 때문이겠지만, 알았어도 리메이크라는 이름 아래 어떠한 해석을 해도 좋을테니 말이다.
릴리 로즈 뎁의 연기도 칭찬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릴리 로즈 뎁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금수저(조니 뎁의 딸로 유명)로, 혈통 때문에 하이패션에 끼어들었다는 안 좋은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밑바닥부터 올라온 모델들을 깔아보는 식으로 말했던 거 같은데. 이런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타고난 운명을 나무라고 싶지 않지만, 그걸 망각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게 싫다. 하지만 ‘노스페라투’를 보고 역시 타고난 재능은 무시할 수 없구나 싶었다. 아빠와 엄마를 닮아 연기를 잘하더라. 특히 클로즈업이 잦은 이 영화에서 연기가 어색하면 극의 흐름을 깰 수 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영화를 이끌어가야 하는 헬렌을 아주 잘 맡았다고 생각한다.
올록 백작을 연기한 빌 스카스가드도 말할 것 없다. 분장 연기 전문이 점점 되어 가는 것 같은데, 배우 본인이 좋아한다고 하니 할 말은 없다. 400방 사포로 성대를 간 것만 같은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내 목이 다 아팠다. 역겨운 올록 백작 역할 또한 잘 해냈다고 생각한다.
괜히 고전을 높이 평가하는 게 아니다. ‘노스페라투’를 보면서(비록 리메이크지만) 이 이야기가 담은 원형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인물 하나 하나가 가진 깊이가 달라서 이들의 행동 하나를 비트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다양해질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만약 헬렌의 의지가 약해서 올록 백작의 아내로의 삶을 원했다면? 프란츠 교수가 정말 미친 사람이라서 올록 백작의 하수인이 되기를 바랐다면? 토마스가 유약하지 않고 헬렌의 말을 들었다면? 프리드리히 하딩이 아내보다 토마스를 더 사랑했다면? 이런 저런 상상만으로도 이야기가 풍부해지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점이 고전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자체만으로도 훌륭하지만, 이야기가 가진 힘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하나 의문인 건, 올록 백작의 저주가 담긴 책에는 왜 올록 백작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써져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게 틀렸으면 꿈과 희망도 없는 거 아닌가? 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걸까.
호러 영화라고 하지만 초반 몇 장면을 빼면 깜짝 놀래키는 장면이 없다. 분위기로 서서히 조이는 영화라서 그리 무섭지도 않으니 큰 스크린에서 보기를 추천한다.
+ ‘노스페라투’가 소설 ‘드라큘라’의 판권을 사지 못해 탄생한 영화라는 걸 알았다. 허허. 마냥 곱게 볼 수는 없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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