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가득한 개인 기록용 감상문
2025.02.24.
‘브루탈리스트’도 예고편이 떴을 때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 1950년대 미국을 찾은 이민자의 이야기, 주인공 라즐로 토스 역을 맡은 애드리언 브로디가 나오는 영화는 대체로 실망한 적이 없기 때문에 더 기대되었다.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온 헝가리 난민 라즐로 토스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필라델피아—미국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품지만, 미국은 겉만 번지르르한 야욕과 야망이 가득한 야만의 공간이었다. 라즐로는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상처를 입고, 어렵게 자리를 잡은 미국을 떠나 동포가 모인 이스라엘로 돌아간다.
이렇게만 보면 라즐로가 역사의 피해자인 것처럼 보이지만—물론 피해자는 맞다— 완벽한 선인이라고 하기에는 복잡하다. 개인에게 들이댈 수 있는 선함이란 게 판단하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마약을 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더라도 자신이 처한 가난이나 고통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마약을 약으로 사용하는 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이 사람을 악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사람은 살면서 실수를 하기 마련이니까. 인간은 한 면만 존재하지 않는다. 복잡하다.
라즐로는 헝가리에서 유명한 건축가였지만,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평생에 걸쳐 쌓아올린 능력을 하루아침에 버리게 된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은 자그마한 틈에서도 빛을 내니, 그것이 그를 쓰레기 같은 인생에서 구한다. 처음에는 결코 좋은 만남이라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를 구렁텅이에서 구한 사람이 해리슨 리 밴 뷰런이다. 해리슨은 라즐로의 천재성에 반해 어머니의 이름을 딴 지역사회 발전 센터를 지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에 억류되어 있는 아내 에르제벳과 조카 조피아를 데려온다.
여기까지만 보면 해피엔딩이 기다릴 것 같지만 인생은 그리 녹록지 않다. 그래, 쉽게 가면 인생이 아니지.
영화는 인간들의 미묘한 권력 관계를 보여준다.
처음 아틸라를 만났을 땐, 미국까지 힘겹게 온 사촌에게 뭐든 내어줄 것처럼 말하지만, 해리슨의 극대노(오해)에 그를 헌신짝처럼 버린다. 그의 아내인 오드리에게 추근대지 않았냐면서 당장 나가라고. 의지할 곳이 없는 라즐로는 종교 시설에서 제공한 공용 숙소에서 지낸다.
해리슨은 라즐로의 천재성에 반했다고 프로젝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지만 은연중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당신과 대화하면 지적 자극을 얻는다,면서 라즐로를 띄우지만 5년이나 미국에서 지냈으면서 구두닦이 같은 억양을 고치라면서 1페니를 던진다. 장난 아닌 장난과 농담 아닌 농담으로 라즐로를 갉아 먹는다. 급기야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출장갔을 때는 약에 취한 라즐로(출장 가서 약을 하고 싶냐!)를 강간한다. 너가 하는 꼬라지를 보니 유대인이 핍박 받은 이유를 알겠다는 개소리도 빼놓지 않는다. 그래놓고선 다음날에는 라즐로에게 술에 너무 많이 취했다고 침대채로 옮겼다고 말한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라즐로는 어딘가 망가진다.
관계의 권력 관계는 부부 사이에도 존재한다. 라즐로는 아내 에르제벳이 있지만 창녀를 사서 성욕을 풀고 파티에서 만난 여자와 키스를 한다. 그러면서 에르제벳이 미국이 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하지만 막상 에르제벳과 만나니 라즐로는 마냥 기쁘지 않다. 에르제벳은 영양실조로 골다공증을 얻어서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다. 누군가 도움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이고, 수용소 생활로 얼굴이 많이 상했다. 자신이 알고 있던 푸릇푸릇한 아내가 아닌 늙어버린 아내를 보고 라즐로는 적잖이 실망한다. 이 사실을 에르제벳은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용서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에르제벳은 절제력이 부족한 라즐로를 지지하는 버팀목이다. 때로는 혼도 내고 때로는 달래가며 그가 무너지지 않도록 도운다. 라즐로가 인생에서 얻은 최고의 행운은 해리슨을 만난 것도 아니고, 미국에 온 것도 아니다. 에르제벳을 만난 것이다.
3시간 30분에 걸친 긴 영화지만 푹 빠져서 봤다. 중간에 15분 인터미션이 있어서 러닝 타임보다 짧다.
실제로 라즐로 토스란 건축가는 없다. 안도 타다오 때문에 브루탈리즘—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하는 건축가에게 관심이 있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라 놀라면서도 공부가 부족하다고 느꼈는데, 가상의 인물이었다. 실제로 느낄 만큼 라즐로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만들었다. 라즐로의 건축 세계를 설명할 때는 안도 타다오의 건축 세계를 설명한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슷하게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해서 참고를 했나 보다.
에필로그에서 조피아가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니라 목적지라는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건축 비엔나에서 업적을 기릴 만큼 기라성 같은 건축물을 남긴 라즐로가 돌아 돌아 왔지만 사람들에게 인정 받았으니 되었다,고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끝만 좋으면 다 좋다는, 과정따위 소용없다는 체념하는 것처럼 들렸다. 언제가 끝이란 말인가. 성공해야 끝인가? 아니면 죽음이 끝인가? 그 끝을 알 수 없다면 우리는 계속 과정에 있는 것인가? 끝이 좋으면 다 된다는 말은 어딘가 서글프다. 어쩌면 아직 성공하지 못해서 그런 걸지도 과정이 중요하다고 믿는 걸지도 모르겠다.
왜 감독은 브루탈리즘을 사용하는 건축가를 내세웠을까 생각하면, 브루탈리즘은 최대한 자연과 어울리도록 지으려고 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더라도 빛과 공간의 힘으로 건축물이 자연에 녹여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어있다. 그런 것처럼 라즐로는 누군가의 잣대에 의해 깎이고 꺾이는 게 아닌 그가 가진 그대로 인정받길 바라지 않았을까?
해리슨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사라졌을까. 라즐로는 이스라엘에서 동포들과 함께 잘 살았을까.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잊었을까.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가 지은 건축물을 보고 싶어졌다. 특히,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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