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가득한 개인 기록용 감상문
2026.4.22.
올해 초 일본에서 개봉한 ‘기동전사 건담 : 섬광의 하사웨이’의 2부, ‘키르케의 마녀’가 드디어 한국에서 개봉했다. 1부인 ‘섬광의 하사웨이’도 극장에서 보았다면 좋았겠지만 코로나 시국이라 넷플릭스에서라도 본 게 어디냐는 생각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국에 들어오는 게 당연해졌지만 극장에 걸리는 건 별개의 문제라서 극장에 걸려서 참 다행이다. IMAX 같은 특별관에서도 볼 수 있다니 건담을 오랫동안 봐왔고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감격스럽다, 라고 하면 호들갑일까?
‘키르케의 마녀’는 ‘섬광의 하사웨이’에서 연을 만든 세 사람, 하사웨이, 케네스, 기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사웨이는 기기를 잊지 못한다. 퀘스를 떨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케리아의 읊조림처럼 정신을 못 차린다. 어느 정도냐면 작전 브리핑이 오가는데 수시로 기기를 떠올리는 바람에 관객인 나조차도 정신이 팔릴 정도다. 미묘한 감정은 연인인 케리아에게 전해지고 그녀는 하사웨이에게 이별을 고한다. 뒤늦게 하사웨이는 케리아를 붙잡으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떠난 후다. 케네스는 관료들을 지키기 위한 작전을 세운다. 어디서 회담이 이뤄지는지 모르도록 기만 작전을 펼친다. 케네스와 가까이 있던 기기는 하사웨이에게 세 곳 중 진짜인 곳을 알려준다. 덕분에 하사웨이는 지구연방군에게 한 방 먹이지만 마프티 군대도 인원을 잃는다. 한편 기기의 예언—번뜩임 덕분에 하사웨이를 조이는데 성공, 하사웨이는 부대가 후퇴할 수 있도록 시간을 끌기 위해 아류제우스와 싸운다. 하사웨이는 아류제우스를 탄 레인 에임을 죽음으로 몰고 기기가 레인 대신 인질로 나선다. 하사웨이와 기기가 재회하는 것으로 ‘키르케의 마녀’는 끝난다.
3부작인 경우 2부는 1부와 3부에 비해 심심하다는 평을 대체로 듣는다. 1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등장인물들의 목표를 제시하기 때문에 흥미진진하다. 3부는 절정으로 치달은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때문에 또한 재밌다. 2부는 1부와 3부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서 비교적 심심하다는 평가를 내린다. 여기에 반박할 만한 3부작 시리즈가 차고 넘치는 것 또한 사실이나 2부에 해당하는 ‘키르케의 마녀’에서 전투 위주의 도파민 터지길 기대한 사람이라면 아쉽다는 평가를 내릴 것이다. ‘키르케의 마녀’는 ‘섬광의 하사웨이’보다 전투씬이 적다. 애초에 ‘섬광의 하사웨이’ 시리즈 자체가 ‘기동전사 건담’이나 ‘역습의 샤아’처럼 전쟁을 전면적으로 그리지 않고 게릴라성에 가까운 전투를 반복하니 이렇다할 전투 장면이 없다. 극 마지막에 크시 건담과 아류제우스가 맞붙는 장면을 제외하면 정말 눈요기할 게 없다.
‘키르케의 마녀’에서 중요한 건 등장인물들의 심리 변화다. 주인공 하사웨이 노아가 훗날 마프티 동란이라고 기록되는 이 사건들을 저지르는 이유는 ‘역습의 샤아’에서 자신이 한 일들 때문이다. 하사웨이는 제2차 네오지온 항쟁에서 퀘스를 구하지 못하고 아무로의 애인인 첸을 죽인다. 하사웨이는 그 일에 가슴 깊이 후회하고 있다. 아무로의 말처럼 사람들이 보여준 기적 때문에 하사웨이는 인간을 믿어보기로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구에 사는 고위층은 가난한 사람들을 우주로 내몰고 자신들만을 위한 파라다이스를 세우고 절대 들어오지 못하도록 쫓아낸다. 아무로를 비롯한 많은 생명이 꺼지면서 지키려고 했던 일이 허무해지는 순간이다. 하사웨이가 샤아의 뜻을 내걸고 싸우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건 옳지 못하다. 내부에서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외부의 폭력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관료들만 쏙쏙 테러한다는 게 마프티의 작전이지만 그것 때문에 죄없는 민간인들이 맨헌터에게 당한다. 로봇 머리에서 본 풍경은 참상을 실제로 겪는 사람들과 다르게 볼 수밖에 없다. 샤아처럼 내부에서 바꾸려는 노력을 해보면 어땠을까 싶지만 샤아나 아버지인 브라이트가 처한 상황을 보면 하사웨이에겐 헛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하사웨이는 아무로도 샤아도 되지 못하고 둘 사이에서 방황한다. 이는 극에서도 나오는데 맨헌터가 민간인을 죽이고 마프티 이름을 내건 오엔벨리 군이 지구연방군을 죽이는 것에 비해 하사웨이는 그렇게 못한다. 순수함을 잃지 않은 이상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가우만의 말처럼 너무 순진하다. 안타깝게도 전쟁은 이성적이고 이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지켜야할 선이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 선을 지키는 건 아니다. 상식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한 인간이 현실에서도 존재한다. 오히려 전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선을 넘으려고 한다. 하사웨이는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은 가면을 뒤집어 쓴 것이다.
하사웨이는 과거에 남긴 후회를 떨치고 싶어하고 감정에 휘둘리고 싶어하지 않고 육욕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이는 인간을 초월하고 싶은 거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인간은 신이 아니며 절대 신이 될 수 없다. 신이 된다면 안고 있는 문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럴 수 없다. 그렇기에 신은 그저 인간을 지켜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사웨이가 과거의 중력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칠수록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는 사실만 깨달을 뿐이다. 그래서 포기할 것인가?
‘키르케의 마녀’는 부제처럼 기기의 성장 혹은 변화를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기기는 고위층—백작의 내연녀다. 빈자가 돌멩이처럼 길거리에 나뒹구는 와중에도 그녀는 값비싼 옷을 걸치고 번듯한 호텔에서 지낸다. 방에는 무조건 수영장이 딸려 있고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은 쩔쩔 맨다. 비단 그녀의 외모뿐만은 아니다. 그녀를 비추는 후광 덕분이다.
기기는 처음에는 하사웨이가 재밌어서 흥미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지구연방군의 영웅 브라이트 노아의 아들, 하사웨이 노아. 하지만 그가 마프티라는 걸 한눈에 꿰뚫어보고 그의 생각에 감화된다. 그래서 케네스 주위에 머물며 하사웨이를 돕고자 한다. 기기가 그런 행동을 하려는 이유에는 그의 스폰서인 백작에게 있다. 백작은 죽을 때까지 유산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백작은 어린아이처럼 기기에게 매달리며 해야 하는 일이 남아있다고 징징댄다. 늙어서 휠체어 신세를 진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란 하나다. 과거에 그가 하지 못하고 지나친 일. 그것이 무엇인지 나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목숨을 다하더라도 현재 할 수 있는 일은 당장 해야 한다는 것. 후회를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 기기가 케네스를 떠나는 이유다. 케네스는 바빠보인다는 기기의 물음에 ‘인생이란 그런 법’이라고 대답한다. 기기는 이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린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법. 때때로 사람들은 인생은 마치 운명처럼 정해져 있어서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대한다. 이것은 과거 백작이 기기에게 한 말이기도 하지만 그런 백작도 과거에 자신이 이루지 못한 일, 했어야 했지만 하지 못한 일로 후회한다. 기기는 하사웨이를 육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희롱하고 케네스 주위를 맴돌며 하사웨이에게 쓸 만한 정보를 물어주고 케네스의 행운의 부적 정도로 치부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것들 이상으로 영화에서 많은 역할을 한다. 기기 역시 변화하는 인물 중에 하나이다. 오히려 하사웨이나 케네스보다 훨씬 능동적이다. 백작의 후원을 내팽겨치고 케네스가 속한 부대로 가는 것도 그러한 일환 중에 하나다.
전투씬이 극후반부에 몰려있는 건 아쉽다. 그래도 현대 기술로 다시 그린 ‘역습의 샤아’ 부분에서는 감동했다. 그 시절 사용한 분홍색 폭발이나 먹먹한 색감도 오랜 팬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퀘스나 첸, 아무로를 현대 디자인에 맞게 고쳐 그린 것도 좋았다. 하사웨이가 스스로에게 묻는 장면에서 아무로를 자신의 거울로 비춘 건 어이가 없었지만, 하사웨이의 순수함을 보여주는 장치로 보면 나쁘지 않다. 아무로가 등장하기까지의 각색도 훌륭하다고 느꼈다. 1부에서 망가진 페넬로페를 수리하도록 배제하고 아류제우스라는 신기체를 관객에게 내보이고 또 아류제우스의 본체가 양산형 뉴건담이라는 점이 하사웨이가 과거를 회상하고 또 이성을 잃을 수 있도록 변경한 점도 좋았다. 내가 알기로는 아류제우스는 원작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프라모델을 팔기 위해서 새로 만들었겠지만 꽤 적절하게 투입했다고 감탄했다.
3부는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1부에서 2부까지 5년이 걸렸는데 3부는 늦어도 3년 안에는 나왔으면 좋겠다. 코로나 때문에 현재 취재가 어려워서 늦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그런 불행한 일이 없으니 금방 나오겠지? 마지막에 짧게 등장한 브라이트와 미라이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원작대로 따라간다면 정해진 비극을 피할 수 없으니… 각색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해피엔딩이나 프라모델 사업을 이어가기 위해 어설프게 고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리즈인 만큼 ‘키르케의 마녀’를 보려면 ‘섬광의 하사웨이’를 반드시 봐야 하고, 하사웨이가 갈팡질팡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역습의 샤아’는 봐야 한다. ‘역습의 샤아’는 건담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고, ‘섬광의 하사웨이’는 CGV에서 보거나 넷플릭스에서 공개하고 있으니 그것을 보면 되겠다.
#무라세슈코 #기동전사건담키르케의마녀 #기동전사건담섬광의하사웨이키르케의마녀 #영화 #영화감상 #기록 #202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