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디대디 Apr 20. 2024

어렵다.

벼랑에서 끝을 외치며

혼란스럽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고 

솥에 안친 밥이 시간이 지나면 딱딱한 쌀에서 고슬고슬한 밥이 되듯이 

시간이 지나면 분명 내 인생도 어떤 모습으로 (물론 좋은 모습이길 바라며)

익어가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몸이라는 항아리에 갇힌 채 

세월의 풍파는 몸이 대신 막아준 모양으로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는 못될 망정 비루한 몸뚱이는

시간이라는 화로에서 익다 못해 탈 지경인 반면,


내 영혼은 어릴 적 그대로 여전히 어린 채로 남아있는 듯하다. 


대신 세월을 맞아 늙어가고 있는 육체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

전혀 성장하고 있지 않은 내 자아를 호되게 혼을 내야 하는 일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완벽한 불균형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사는 게 

인생이라고 들었다만


매 순간 비슷한 일로 다투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우리 부부


이제 더 이상은 

서로에게 바라는 게 없고 

포기할 부분은 그래 깨끗이 포기하자고 다짐하며

여느 부부와 마찬가지로 (아닐지도)


동화에 나올 법한 행복한 결혼생활은 아니지만 

가끔, 둘이서 영화도 보는 

그런 낭만이 손톱만큼은 있었던 우리.


추리소설이나 공포소설에 나오는 

불길함이 느껴지는 그런 날도 아닌 

어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어느 날 오후에 


한순간 이성을 잃을 만큼 다투고 난 뒤 

바짓가랑이를 잡고 우리 부부 사이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가여운 아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을 때 


마침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끝을 외쳤다. 


아들을 위해 '함께' 살아야 한다 에서 

아들을 위해 '따로' 살아야 한다로 


아직 구체적인 형태나 방법은 희미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끝'을 말하고 있었다. 


지금 나는 

도대체 어떻게 익어가고 있는 걸까. 


가끔 출구가 없는 삶이라는 미로에 갇혀있는 기분이 든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무언가를 

요구받는 기분으로 


이 사단을 만들고 나서 

또,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모든 일을 외면한 채 

'비겁자'로 살기를 바라는 

내가 밉다. 


어쩌면 지금 나에게는 

하루키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신비한' 체험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이데아'니, '메타포'니 하는 어려운 말은 모르지만 


아니면 '데우스엑스 마키나'가 필요할 지도. 


이 모든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더 이상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대감 0%인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면 

도무지 나는 '니체'가 말했던 그런 사람으로 살기에는 힘들지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관계회복 그리고 상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