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승윤 Mar 28. 2024

06. 피자

<90년생 나는 세상을 이따위로 이해하련다>

나의 사랑 피자. 바삭하게 구워낸 도우에 고소한 치즈. 게다가 어떤 토핑을 올려도 너무 잘 어울리는 완벽한 음식. 나는 거의 모든 종류의 피자를 좋아한다. 집 주변에서 간단히 포장할 수 있는 동네 피자부터 전문점 타이틀을 달고서 꽤 괜찮은 품질의 배달 피자를 제공하는 가게, 매장을 방문해야만 만날 수 있는 정통 화덕피자까지 웬만한 피자는 다 먹어본 것 같다. 토핑 역시 육해공을 넘어 각종 과일이나 심지어 김치, 낙지, 피라미(...)까지. 그러고 보니 나 진짜 피자 좋아하네.


당신 인생의 첫 피자는 무엇입니까? 나는 분명히 기억난다. 내가 국민학교(2학년에 들어서며 초등학교로 바뀌었다)를 들어갈 때쯤이었나 그 이후였나. 우리 엄마가 직접 구워준 그 피자가 내 인생 첫 피자였다는 걸.     


당시 우리 집에는 복합 오븐 가스레인지가 있었는데, 상단은 4구짜리 가스레인지였고, 하부는 꽤 넓은 오븐으로 구성돼있었다. 웃기게도 우리 아빠는 왜 쓸데없이 오븐 딸린 레인지를 사냐며 잔소리를 퍼부었는데, 엄마는 이를 방어하기 위해 피자를 구워주며 ‘이렇게 복합 오븐 레인지가 쓸모 넘친답니다?’를 어필했다. 그 첫 실험체는 바로 나였던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표 수제 피자는 꼬다리가 꽤 딱딱했다는 것, 그리고 적정 조리시간을 넘긴 모차렐라 치즈의 겉 부분이 갈색이었다. 하지만 내겐 인생 첫 피자였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아직도 우리 엄마가 구워준 그 ‘환상의 피자’가 눈과 혀끝에서 아른거리는 것만 같다. 세상 고소한 냄새, 먹음직스러운 빛깔과 함께 말이다. 알고 보니 동생도, 아빠도 포기한 꼬다리까지 다 먹어준 이는 나밖에 없었다고.     


그러나 울 엄마의 수제 피자 프로젝트는 이게 마지막이었다. 최근까지도 나는 엄마에게 환상의 피자 이야기를 슬며시 꺼냈지만, 엄마에게 당시 수제 피자는 영 좋은 기억이 아니었나 보다. 이후 가스레인지 아래 딸린 오븐을 쓸 방도가 도저히 없었기 때문인데, 내 기억에도 수제 피자 이후 엄마가 오븐을 사용한 기억은 전혀 없다. 마치 달걀 몇 번 굽다가 사라진 ‘슬로우 쿠커’, 생식 몇 번 마신 게 전부인 ‘도깨비방망이’처럼 말이다.




대학 시절 우리 학교 후문에는 꽤 유명한 수제 피자집이 하나 있었다. 수십 년간 피자에만 몰두해 온 피자 장인이 본인 이름을 걸고 운영하던 가게였다. 내가 서울에서 처음 먹어본 피자는 분명 이 집 피자였지 싶다. 1학년 학기 초라 아직은 데면데면한 과 동기들과 어쩌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게 됐는데, 내겐 상당히 곤란한 기억이다. 스마트폰이 없었던 시절이라 나는 이 가게 피자 가격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전혀 몰랐거든.     


서너 명의 동기들과 함께 찾은 피자집에서 우선 나는 메뉴판에 매우 놀랐다. 라지 피자 한 판에 2만 원에 가까운 데다가, 여기 각종 토핑과 치즈크러스트를 추가하고, 오븐 스파게티까지 더하고 나니 가격대가 상당히 올라갔다. 더 충격적인 것은 다른 친구들이 아무렇지 않게 피자 위에 온갖 토핑을 올리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애초에 몰랐다. 피자 위에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추가 요금을 지불하고서 올릴 수 있다는 걸.     


그렇게 등장한 피자가 어떤 맛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한 건 내가 그 피자값을 인원수에 맞춰 내고 나면 나는 통장 잔고를 계산해 적절히 재분배해야 한다는 사실이었고, 그래서 식사 내내 불편했다. 결국 그 유명 장인의 피자는 내게 ‘실존하는 빈부격차를 코앞에서 목도하게 해 준 피자’로 남았다. 그때 함께 했던, 그다음 학기까지 함께 수업을 들었던 경이는 내게 ‘루이뷔통’이란 브랜드를 처음 알려준 친구이기도 했지.    

 

이 사건은 내가 피자 중에서도 유독 치즈 피자, 또는 페퍼로니 피자만 선호하게 된 것과 완전히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물론 실제 맛도 위 두 가지 피자가 제일이라 생각하지만, 굳이 피자 위에 새우니, 불고기니, 스테이크니 올리고 싶지 않다. 돈 아깝잖아. 먹어도 따로 먹는 게 낫지. 늘 답은 페퍼로니로 정해졌으나 슬쩍 배달앱을 내려 어떤 토핑이 있는지 구경하는 나. 그러고 있으면 학교 후문 언덕을 내려오며 속으로 ‘다음엔 저기 절대 안 가야지’ 되뇌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전역 후 동료들과 운영하던 조직을 사회적 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때가 있다. 당시 밤낮없이 낡고 냄새나는 사무실 구석에 박혀있던 나는 그래도 잠은 집에서 자야 한다는 일념에 대부분 막차를 타고 귀가했는데, 만약 그때까지 과나 동아리 사람들이 술을 퍼마시고 있다면 거기 합류했고, 그렇지 않다면 아쉬운 마음에 맥주 한 캔에 안줏거리를 사다 집에 들어오곤 했다.     


나는 우리 부모님 유전인지 위나 장이 튼튼한 편이다. 밤이든 새벽이든 어떤 음식을 먹든지 간에 속이 불편한 적 없다. 그래서 당시 내 안줏거리 선택의 폭은 꽤 넓었다. 다만 금액적 한계는 뚜렷했기에 대부분 편의점 음식으로 해결했다. 저녁을 먹고 들어온 날엔 간단한 과자류면 충분했으나, 저녁을 거른 날엔 도시락이나 떡볶이 등 야식으로 규모가 커진다. 한 달에 한 번쯤은 후문에 있는 썬더치킨에 들러 치킨을 사 들고 오기도 했지. 이런 날은 소주도 한 병 사다 궁상을 떨 수 있다.     


어떤 날은 이런 생각을 했다. 편의점에 적당한 가격의 피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냉동 피자가 있긴 했으나 썬더치킨보다도 훨씬 비싼 가격에, 우리 집엔 전자레인지가 없어 한판을 모두 처리하기 애매했다. 만약 남기라도 하면 아까워서 어떡한단 말인가. 그래서 매번 아쉬웠는데, 어느 날 편의점용 조각 피자가 떡하니 등장한 것이다. 이후 몇 달간을 주야장천 편의점 피자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친하게 지낸 편의점 사장님이 내 것을 따로 빼두었을 정도로.     


비록 얼마 안 가 ‘편의점 피자 모조 치즈 사태’가 발생하며 내가 사랑한 편의점 피자의 진실에 대해 깨닫게 됐으나, 후회는 없었다. 고급 음식인 피자를 저렴한 1인용으로 출시하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편의점 관계자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이후 편의점 피자가 새롭게 다시 출시된 이후에도 나는 종종 이를 사다 먹는다. 피자는 내게 빈부차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음식이니까.




초등학생 때였다. 집으로 막내 이모가 놀러 왔다. 점심으로 뭘 먹을까 이야기하던 중 나는 당시 엄마가 한 달에 한두 번쯤 시켜주던 피자집이 생각났고, 이걸 배달시키자고 강력하게 추천했다. 사촌 동생들까지 왔으니 여기 전단지에 있는 세트메뉴를 처음으로 시켜보자고. 스파게티랑 치킨텐더도 준다고 말이다.     


그렇게 도착한 피자를 이모는 몇 입 먹더니 “맛이 없어서 못 먹겠다”라는 거다. 그 피자는 2000년대 들어 하나둘 등장한 대표적인 저가 피자 브랜드 중 하나였는데, 이모는 유명한 피자집들이 많은데 왜 여길 시켰느냐며 짜증을 냈다. 그러자 사촌 동생들도 당황한 듯 하나둘 피자 조각을 내려놨다. 우리 엄마는 좀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나는 맛만 좋은데 왜 그래요?” 피자가 도착하기 전 이미 맛없는 815 콜라를 사 왔다고 이모에게 한 차례 타박을 받았던 나는 피자에 대한 평가마저 박하자 오기가 생겼나 보다. 다만 우리 막내 이모는 좀 직설적일 뿐 어릴 때부터 누구보다 나를 아낀 친구 같은 존재라 분명 악의 섞인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모의 말에 슬픈 얼굴이 된 우리 엄마의 자존심을 지켜야 했다. 아니, 앞서 나는 정말 그 집 피자가 맛만 좋았거든. 그래서 확실히 했다. 우리 가족은 원칙이 있다고. 한정된 예산 안에서 함께 먹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음식을 선택한다고. 누가 더 비싸고 고급진 음식을 먹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 다음에 직접 사달라고. 그럼 맛있게 같이 먹겠다고.     


물론 이렇게 당당하고 조리 있게 말하진 못했지만, 나는 맛없다던 그 피자를 우걱우걱 잘만 먹었고, 이모의 말에 꽤 퉁명스럽게 맞섰다. 그렇게 피자는 내 생에 최초로 스스로 삶의 방향과 결심을 내뱉게 한 음식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래서 학교 후문 장인 피자집의 추억 역시 내겐 괴로운 기억이 아니다. 불편한 식사를 마친 뒤 언덕을 내려오는 길. 조금씩 후텁지근해지는 5월 낮의 공기 속에서 나는 내 신세를 한탄하거나, 같이 간 친구들을 원망해 본 적 없다. 단지 그 돈이 너무 아까웠던 나는 ‘같은 돈으로 내가 제일 행복한 게 뭔지 찾아야지’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렇게 매 끼니를 마트 식빵과 쨈으로 때우길 반복한 나는 열심히 낙원상가를 뒤져 끝내 원하던 고가의 일렉 기타를 중고로 손에 넣었다는, 그리고 경이를 포함해 피자를 함께 먹었던 친구들 모두 내 첫 공연 무대에 찾아와 장미꽃 한 송이씩을 전해줬다는,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