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83년, 대한민국 정부는 에너지 절감의 일환으로 세운 ‘국민차 보급 추진 계획’을 세웠다. 차체 크기는 작으면서 실용적이어야 했고, 가격은 저렴하면서 널리 보급될 수 있는 차를 원했고, 정부는 당시 현대차, 기아차, 대우차, 쌍용차를 상대로 국민차 사업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980년도 말, 수년간 국민차 사업을 논의하던 내용이 점차 그 형태를 잡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국민차 사업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구체화가 되기 시작하면서 사업을 영위해 나갈 사업자도 결정되었다. 그곳은 바로 대우조선공업인데, 뜬금없이 조선소에서 자동차를 만드는 게 생뚱맞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이 시간은 대우차 티코의 탄생 배경과 역사를 알아보도록 해보자.
1991년
국내 유일
경차로 시작하다
티코의 존재는 국가에서 실시한 국민차 보급 추진 계획의 열매였다. 당시 대우조선은 일본의 스즈키와 계약을 맺으면서 알토 3세대를 들여와 이를 기반으로 차량을 생산 및 판매에 돌입하였다.
오리지널 모델인 알토 3세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소소한 디자인 변경만 이뤄졌으며, 엔진 또한 알토 3세대의 수출형 엔진인 F8B 카뷰레터 엔진을 개량해 F8C라는 형식 명으로 출시한 이 엔진은 최대 출력 41마력, 최대 토크 6.0kg.m를 냈으며, 수동 4단, 수동 5단, 3단 기계식 자동을 제공했다. 이때 국내에선 이 엔진을 ‘헬리오스’ 엔진이라 불렀다.
티코의 탄생은 국민차, 저렴한 가격으로 널리 사용되기 위해 1991년 당시 출고가를 200만 원대로 목표를 삼고 개발하였으나, 부품 단가와 당시 경제 배경을 토대로 물가 인상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때문에 티코는 에어컨, 시계, 파워 윈도우 등 각종 편의 장비는 다 빠지고 4단 수동 변속기를 얹은 엔트리 등급을 299만 원이란 가격대에 판매를 하였고, 나머지 주력 트림들은 300만 원대를 오가는 가격대로 출시되었다.
→ “솔직히 한국에 이런 차 있는 줄 몰랐죠”
당시 현대차 준중형 세단인
엑셀보다 저렴한 가격대
1991년 당시 현대차의 준중형 세단인 엑셀이 존재했다. 엑셀의 경우 1.3L 엔진과 1.5L 엔진 총 두 가지의 라인업이 존재했으며, 당시 경쟁 차종이던 대우차의 르망보단 낮은 급의 차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이 말인즉, 엑셀 또한 경제형 승용차 범주에 있었단 소리가 된다. 엑셀 1.3L 엔진을 장착하고, 아무런 옵션을 장착하지 않은 ‘L’트림을 기준으로 출시 가격이 445만 원을 형성하였다.
앞서 전술했던 티코의 ‘무옵션’ 엔트리 트림을 제외하고, 주력 트림으로 밀었던 300만 원대 주력 트림인 ‘SE’가 319만 원, 가장 높은 트림이었던 DX가 359만 원이었던걸 생각해 보면 당시 물가로도 저렴한 차량이었다.
저렴하고 실용성 좋고, 연비 좋은 티코였지만 출시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었다는데, 과연 어떤 이유에서 인기가 없었던 것일까?
지금의 시대배경과
많이 다른 소비패턴
보통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차가 출시하게 되면, 사람들은 열광하기 마련이다. 이는 1980년대, 199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티코는 분명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에서 여태껏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새로운 개념의 신차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소비자들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유는 바로 당시 시대 배경에서부터 비롯된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포니를 통해 마이카 붐이 일어났었지만, 여전히 1가구당 자가용 1대는 고사했다. 더욱이 1991년에는 국산차 시장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고 있던 시점이었는데, 현대차에선 준중형차 엘란트라를 출시하고 소형차인 엑셀의 페이스리프트를 진행했다.
아울러 대우차의 준중형차 르망도 페이스리프트와 파워 트레인을 변경하여 상품성을 강화했고, 기아차의 준중형차 캐피탈은 1.5L DOHC를 장착하면서 마이너 체인지를 거쳤다. 여기저기서 “우리차가 최곱니다!”를 외치고 있는 판국에, 같은 가격대에서 큰 차를 선호하던 시대 배경까지 겹쳐 티코의 설 곳은 마땅치 않았다.
사실 지금도 이 같은 시선이 큰 폭으로 변한건 없다. 그러나 당시에는 유난히 더 심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이었다.
→ “이건 다시 나와도 대박납니다”
이후 IMF까지
이어지는 티코의 인기
위 같은 이유로 1990년대 초중반까지는 티코의 인기가 썩 좋질 못했다. 이를 반증하는 사실 하나는, 올드카로 높은 몸값을 자랑하는 티코의 매물을 찾아보면 하나같이 1996년식 이후의 차량들이 많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귀한 초기형 매물들이 더욱 씨가 마른 이유가 이 같은 이유다.
아무튼, 1990년대 중반기로 들어서면서부터 대한민국의 버블 경제가 최고조에 달했을 시기였다. 이때에는 각 가구마다 차량을 구매할 여력이 1990년대 초반 대비 한층 더 높던 시절이었고, 1가구당 2개의 차량을 운용하는 곳도 늘어나던 시기였다.
더욱이 1가구 2차량 중과세 제도가 경차에는 해당하지 않았기에, 가정에서 장 보는 마실용 혹은 사회 초년생들의 자가용으로 많이들 찾았다.
이후 1997년 IMF가 들이닥치면서 현대차의 싼타모를 비롯한 수많은 경제성 높은 차량들이 히트를 치게 되는데, 그 히트작들 중 하나가 바로 티코였다. 자고로 당시 소비 패턴은 자고로 최저 가격으로 높은 만족도를 추구하던 패턴이었기에, 티코의 판매량은 한없이 치솟게 되는 계기였다.
내수용 2000년 단종
수출형 2001년 단종
대우차가 티코의 뒤늦은 부흥, 그리고 남들보다 먼저 앞선 경차 기술력은 곧 자신감으로 이어졌고, 이를 토대로 1998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티즈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대우차는 아이러니하게도, 티코의 판매를 병행하였는데 정확한 이유는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당시만 하더라도 티코의 수요가 존재했단 것이었다.
아무튼, 티코의 꾸준한 수요 덕분에 2000년까지 국내에서 판매되었으며 2001년 초까지 수출을 위한 생산을 지속하고, 티코의 10년 역사는 마무리되었다.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상 가장 정겨운 차를 꼽아 보자면, 당연히 티코가 1순위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전 국민들에게 많은 추억을 선사한 티코, 그러나 국민차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빠르게 없어져 아쉬울 따름이다. 오늘 이 시간은 대우차의 명차 티코를 만나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