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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길

by 은연중애

2020년 6월 30일 나는 베트남에서 1년 8개월간 한국어 강사로서의 임무를 완료하고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약 2년간의 체류 기간 동안에 시나브로 늘어났던 가재도구들은 주변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나의 짐은 처음 이곳에 올 때처럼 캐리어 하나와 이민 가방 하나로 남았다. 코로나로 인해 돌아오는 길도 만만치 않을 것이 예상되었지만 별일 없이 임무를 다 마치고 고향으로 가는 마음은 명절 맞은 어린아이처럼 설레었다.


떠나는 날, 나의 아파트에는 몇 명의 베트남 동료들이 방문해서 공항까지 배웅했다. 오랫동안 나의 비밀의 화원 같았던 친구 Bihn과는 전날 따뜻한 포옹으로 인사를 하고 떠나는 날에는 절대 우리 집에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여러 사람 있는 곳에서 공식적으로 그녀와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어코 그녀는 우리 집 문고리에 배웅하는 동료들 몫까지 생각하여 여러 컵의 주스를 걸어 두고 가는 것으로 그녀만의 이별식을 했다.


함께 한국으로 출국하는 동료 한 명과 배웅하는 베트남 친구들을 포함하여 8인용 택시를 가득 채워 Hue 공항으로 갔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까지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마치 함께 놀러 가는 것같이 따뜻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헤어지고 Hue에서 비행기로 하노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정적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노이에서 해외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공항에는 사람 흔적을 발견하기 어려웠다가 막상 비행기를 타니 어디선가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비행기를 꽉 채웠다. 비행기 안에서도 무거운 정적과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화장실을 가지 않기 위해 물은 일절 먹지 않았고 코로나 감염을 막기 위해 손에 수술용 라텍스 장갑을 꼈는데 공기가 통하지 않으니 두어 시간만 끼고 있어도 손에서 물이 주르륵 흘렀다. 밤에 간단한 요깃거리로 마른 빵 한 조각을 받아먹었다. 그때 잠시 마스크를 벗었다가 얼른 급하게 썼다.


여러 나라 사람이 좁은 이코노미석을 꽉 채우고 있었고 하노이에서 인천까지 밤을 새워 오는데 모두들 눈이 반짝반짝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우리는 마치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모르는 우주선을 타고 가는 느낌이 들었다.


새벽이 되어 날이 밝아오면서 드디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감격도 잠시 인천 공항에서 전화로 가족 누군가가 받아야 통과하는 것이 가능했다. 남편에게 전화했는데 아무리 전화를 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지방도 아니고 외국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오는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고 도대체 뭐하는지! 한참 만에야 남편과 통화가 되었고 나는 공항을 통과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평소와 달랐다. 외국에서 돌아오는 사람들만이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을 패널로 만들어 두고 그곳을 지나야 했다. 공항버스를 탈 수도 없었다. 10 만원 주고 외국에서 오는 사람을 위해 특별히 제공되는 택시를 탔다. 기사와 승객 사이에 커튼 같은 것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집 근처에 도착해서 먼저 보건소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고 난 뒤 그제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2주간 격리를 해야 했다. 시어머니는 친척 집에 가 계시고 아들들도 집이 아닌 다른 곳에 가 있고 덩그러니 남편만 남아있었다. 남편과의 눈물의 재회나 반가운 해후 같은 것은 없었다. 남편에게 미친 듯이 신경질을 내었다. 마치 유치원 갔다가 아무것도 못 먹고 집에 와 고래고래 땡강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남편에게 짜증을 있는 대로 내었다. 뭐 했냐고. 전화 안 받고. 남편은 내가 올 것을 대비해서 에어컨 청소를 하느라 전화 소리를 못 들었다고 변명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온몸의 피로가 나를 짓눌렀다.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화장실 갈 때만 겨우 일어났는데 힘겹게 일어나야 했다. 코로나에 걸린 것도 아니었고, 병도 나지 않았는데 그랬다. 그렇게 며칠을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남편은 나의 신경질을 묵묵히 받아주었고 자가격리가 원칙이었는데도 무시하고 내 옆에서 잤다. 나는 자고 또 자고 또 잤다. 허리가 아플 정도로 잤다. 지난 2년 동안 긴장했던 마음이 한꺼번에 피로로 몰려왔나 보다.


2주가 지났고 나는 코로나 안 걸렸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어머니와 아들들도 집으로 돌아왔다. 시어머니는 내가 저승에서 살아온 사람처럼 너무 반가워하셨다. 시간이 감에 따라 조금씩 집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2년 전 집을 떠나기 전이나 후나 집은 전혀 바뀌어 있지 않았다.

굳이 바뀐 것이 있다면 모든 공간이 택배상자 창고로 변해가고 있었다는 점이라고 할까. 먼저 시작한 것은 집의 가구 배치를 바꾸는 것이었다.


코로나 기간이어서 활동이 제한된 탓에 남편과 함께 집 근처 숲길을 산책하는 것이 일상의 루틴이 되었다. 숲 산책을 하면서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2년 동안 혼자 외국 생활을 한 후에 돌아온 나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결혼 전부터 시작하여 30여 년을 직장 생활을 해왔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일을 통해 자기실현의 욕구가 끊이지 않았다. 바쁘고 팽팽한 긴장 속에 살아온 삶이었다. 그리고 늘 떠나고 싶었다. 50대 중반을 넘어서 이 욕구가 이렇게 채워진 뒤에야 비로소 이제는 일을 손에서 놓고 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마음의 변화는 남편과 나 두 사람에게 같이 왔다. 같이 살면서도 서로의 눈은 서로에게가 아니라 결혼 생활 내내 밖을 향해 있었다. 떨어져서 보낸 2년의 세월은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게 했다. 바깥으로 향해있던 눈이 남편에게로 향했고 남편에게 좀 기대고 싶었다. 남편도 이제는 내가 집에 머물기를 원했다. 늘 일정거리를 두고 서있는 나무 같았던 우리는 비로소 함께 기대며 늙어가는 부부가 될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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