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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남편, 마스크

by 은연중애

몇 해 전에 온 나라를 휘몰아갔던 코로나는 이제 우리에게 하나의 추억이 되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는 코로나 시절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친구들과 그때 이야기를 할 기회가 우연히 있었다. 그들에게는 코로나는 그저 그 당시에 ‘코로나에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 ‘예방 주사를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가 중요한 관심사였지 코로나로 인한 특별한 사건이나 마음 아팠던 일은 없었다. 그러나 외국에서 혼자 코로나를 겪어야 했던 나는 그들과 많이 달랐다.


2020년 초 처음 코로나가 발생했을 때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스러웠다. 지금 돌이켜 보니 결과적으로는 베트남이 한국보다 안전했는데 그 당시로서는 한국에 돌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팡질팡했고 그러고 있는 와중에 국제공항이 막혀버렸다.


베트남으로 오던 비행기가 하늘에서 방향을 돌려 서울로 돌아가고 공항이 막혔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큰 돌덩이 하나가 가슴에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90을 바라보는 친정어머니, 시어머니에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나는 돌아가지도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불안감에 잠 못 이루는 날들이었다. 게다가 큰아들의 결혼식 날짜까지 봄에 예정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베트남 사람들도 긴장하여 사무실에도, 집에도 군복을 입은 공안들이 찾아와서 나의 건강 상태나 이동 경로를 조사하고 돌아갈 정도였다.


공항이 폐쇄되었으므로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태국 같은 제3국을 경유해야 했다. 이것은 거리, 비용, 안전 면에서 엄두가 안 났다. 그렇다고 그곳에 머물기에는 병원 시스템이나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보다는 열악한 것이 사실이므로 불안하기만 했다. 집을 떠나온다는 것이, 고국을 떠나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온몸으로 깨닫는 상황이었다. 혼자 있는 집이 더욱 적막하게 느껴졌다.


돌아가는 교통편을 찾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나는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가족들의 반응이 놀라웠다. 남편이 나에게 계약 기간 끝까지 임무를 마치고 명예롭게 돌아오라고 하는 것 아닌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더니 예상 밖의 반응에 참으로 섭섭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계속 돌아가야겠다고 하니 교사인 남편이 그 당시 교육계에서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던 zoom을 설치하여 가족회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돌아갈 것인지 말 것인지’가 가족회의 안건이었다.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가족회의에서 나온 가족들의 반응이었다. 가족회의에서 시어머니는 당신 아들의 의견을 따르시겠다고 했다. 두 아들도 딱 부러지는 의견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기가 막혔다.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회의가 끝난 후 아들들의 문자가 왔다. 한 아들은 요즘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힘들어하시니 엄마가 이해하라고 한다. 또 한 명의 아들은 울면서 연락이 왔다. 내가 돌아올 수 있는 비행기 편을 찾아서 문자를 보냈다. 그 문자를 보고 그 밤에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가족들의 반응, 특히 남편의 반응이 그렇게 나오자 섭섭한 마음이 가슴 저 밑에 박혔는지 괜히 오기가 생겼다. 그다음 날 남편이 엄중한 상황을 그제야 깨달았는지 마음을 바꿔서 무조건 들어오라고 메시지를 계속 보냈다.


나는 이미 마음이 돌아섰다. 안 돌아가겠다고 차갑게 대응하면서 대신에 마스크를 급히 보내라고 했다. 우리도 재택근무 체제에 들어가서 굳이 필요는 없었지만 섭섭한 마음에 어깃장을 놓고 싶었나 보다. 사실 그곳은 한국과 같은 그런 세련된 마스크가 없기도 했지만.


비행기도 제대로 오고 가지도 않는 상황이어서 마스크가 도착할 것이라고 기대도 전혀 안 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며칠 되지 않아서 우체부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모르는 번호로 베트남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말을 못 알아 들었지만 우체부라는 직감이 왔다. 딱 한마디 말은 알아들었다. phòng mấy? 우체부가 phòng mấy (퐁 마이)라고 물어보는 데 우리 아파트 호수를 물어본다는 것을 이해했다. 우리 집은 201호다. 아! 중간에 0이 들어가는 데 우체부 아저씨는 영어를 모르고 나는 베트남어를 몰라서 아무리 zero라고 해도 이해를 못 하는 황당한 상황이 되었다.


앞뒤 숫자 2 (hai) 그리고 1(một)만 말하는 상황! 이것만 큰 소리로 반복해서 외치고 있는데 누군가 급하고도 세게 아파트 문을 두드린다. 열어보니 우체부 아저씨가 핸드폰을 들고 나랑 이야기하면서 집을 찾아낸 것이다. 내 목소리가 너무 컸던가? 그래서 여기인 줄 아셨나? 하긴 2층에는 집이 네 개밖에 없었고, 모든 집은 중간에 0 이 들어가니까 사실은 필요 없는 정보이긴 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서 남편이 보낸 마스크가 도착했다.그래도 마스크가 남편인양 반가웠다.

남편이 보낸 마스크


시간이 지닌 힘은 크다. 시간은 빨리 흘러서 나는 남편 말대로 별일 없이 명예롭게(?) 일을 다 마치고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 아팠던 마음에도 딱지가 앉아서 기억은 있으나 마음은 담담하다.


돌아보니 외국에 혼자 있어서 실제 이상으로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반성도 든다. 남편은 ‘일 다 마치고 돌아오길 잘했지 않냐’고 가끔 내 속을 긁어놓곤 한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혼자 외국에서 생전 처음 겪는 위기의 상황에 놓였는데 가족이 나의 힘듦을 공감해주지 않을 때 마음 아프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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