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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 몰아치는 비, 그리고 수업

by 은연중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빗소리가 그렇게 무섭도록 크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베트남에서 처음 경험했다. 자다가 일어나서 한국 가족들에게 이 엄청난 빗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 녹음까지 할 정도였다.


베트남에서 12월은 우기이다. 보름 넘게 쉬지 않고 내리는 비는 나에게는 공포에 가까웠으나 주변 동료들은 이전 해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도로 위에 배를 띄워서 출근했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Hue 궁궐이 물에 잠겨서 연못에 있던 물고기들이 궁궐 마당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페이스북 영상을 보여주면서 이 정도 비는 ‘약과’라는 식이었다.


학생들에게 며칠 동안 해를 보지 못해서 답답하지 않은 지 물어보면 이렇게 비 오는 날에는 집에서 비 오는 창밖을 보며 멜랑콜릭 한 분위기를 느껴서 좋다고 대답하는 둥 다들 이런 생활을 너무 익숙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 세찬 비가 내리던 12월의 토요일 저녁에 수업이 있었다. 토요일 저녁,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만 수업이 있었다. 나는 아직 학교 구조에도 익숙하지 않은 터라 아무도 없는 학교는 나를 불안하게 했다. 밖에는 세차게 비가 오고, 복도는 넓고, 길고, 컴컴했다. 복도는 한국의 일반적인 학교 건물 복도의 2.5배 정도로 넓었는데, 이유를 생각해 보니 더운 나라여서 바람이 잘 통하게 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베트남은 문을 잠글 때 아직도 열쇠를 사용한다. 한국에서는 열쇠를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되어 나는 문 잠그는 것이 서툴렀다. 혼자서 어찌어찌 사무실 문을 겨우 잠그고, 학생들에게 나누어 줄 연습지, 가방, CD player 등을 들고 강의실로 이동하는데 들고 가야 할 자질구레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열쇠, 펜, 분필 등 잡동사니들을 바지 주머니에 모두 넣었다. 순간 이 모든 잡동사니들을 한 번에 쓱 집어넣을 수 있는 주머니 많은 바지를 입고 왔다는 사실이 너무 다행이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과연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에 학생들이 오기는 할까’ 하는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강의실에서 홀로 학생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학생들은 이 세찬 비가 너무나 익숙한 듯 밝은 표정으로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20대의 청춘들은 세계 어디를 가든 그 존재만으로도 밝은 생기를 마구 내뿜어서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이렇게 비 오는 토요일 저녁에 그들을 움직이게 하여 한국어를 공부하게 한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가보지 않은 한국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인가? 혹은 그들의 현실로부터의 탈출구가 한국어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인가? 어쨌든 수업은 그들의 활달한 표정과 열정적인 리액션으로 인해 잘 진행되어 갔다. 비록 처음에는 불안으로 시작했지만 차츰차츰 이곳은 외부의 세찬 비로부터 안전한 피신처라는 마음마저 들었다.


그런데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정전이 되고 만 것이다. 한국에서는 학교에서 정전을 경험해 본 적이 내 기억에는 한 번도 없었다.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학생들이 이 상황이 너무 익숙하다는 듯 전혀 당황하지 않고 모두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핸드폰을 켜는 것이 아닌가!


깜깜했던 교실이 핸드폰의 작은 불빛으로 인해 조금씩 밝아졌고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하나의 공동체라는 일치감을 느끼며 작은 기쁨이 번져나갔다. 전혀 당황하지 않고, 핸드폰 불빛에 의존하여, 내가 나누어준 연습지의 문제 풀이를 하는 학생들이 너무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그 학생들에게 너무 감동해서 선물을 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사무실에서 얼굴 마사지 팩을 가져와서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작은 선물, 마사지 팩. 그것을 받았을 때 학생들이 나에게 보여준 기쁜 표정은 잊기가 어렵다. 학생들은 한국어로 "행복해요!!"를 연신 외쳤다.


세차게 몰아치는 비, 낯선 학교, 토요일 밤, 넓은 학교의 긴 복도 끝에서 사무실 문을 못 잠가서 쩔쩔매던 외국인이었던 나. 악몽이 되었을 수도 있었던 그날의 한국어 수업이 가장 따뜻한 날로 기억되는 마법의 순간이었다. 이것이 가르치는 맛(?) 혹은 힘(?)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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