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부모님 밑에서 자랐던 시간들이 인생에서 1장이라면, 독립해서 내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한 시간들이 2장, 그 아이들이 우리의 품을 떠나 모두 독립하고, 남편과 내가 사회에서 은퇴한 지금이 인생 제3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계절로 치면 우리는 이제 인생의 가을에 있는 셈이다.
남편은 30년 넘게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한 지 4개월쯤 되었다. 나 또한 3년 전에 일을 그만두었다. 직장을 그만두었으니 남는 것이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아주 대조적이다.
은퇴 선배(?)인 나는 매일 시간을 정해서 뭔가를 배우고, 수영하고, 사람 만나는 일로 일과가 빽빽이 짜여 있다. 하고 싶은 것을 활발히 하는 요즘이 나에게는 인생의 전성기라는 느낌이 든다.
반면에 남편은 나처럼 뭔가를 열심히 해서 시간을 채우려하지 않는다. 시간을 비우려고 애쓴다고 힐까. 왠만하면 하지말자는 주의다. 그는 “요즘에는 안 하고 싶은 걸 안 해서 너무 좋다”라는 말을 무심코 자주 뱉는다. ‘안 하고 싶은 것을 안 해서 좋다’는 그 말을 들으면 안쓰럽다. 그도 직장 다니기 싫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직장에서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느라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겠는가. 그러나 가장으로서 의무를 다하느라 자기 마음을 꾹꾹 눌렀던 지난 인생이 그 한마디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남편이 집에 있으니 내가 외출하기가 왠지 모르게 좀 껄끄럽다. 마치 초등학생 아이를 두고 나가는 엄마 마음 같다. 그래도 다행히 남편이 그저 집에만 있지 않고 바깥으로 나가게 만드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텃밭이다. 우연한 기회에 텃밭을 동사무소로부터 분양(?) 받은 것이다.
그래서 남편은 요즘 아침마다 텃밭으로 출근해서 시간을 보낸다. ‘밭의 채소들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고 말하면서 남편은 매일 텃밭에 나가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덕분에 푸성귀들이 잘 자라서 우리도 먹고 이웃과도 나눌 수 있으니 좋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친구들이다. 젊은 시절에는 날마다 남편을 불러내서 미웠던 남편 친구들이 지금도 남편과 만나서 한주에 두세 번은 함께 테니스를 친다. 남편 친구들이 젊었을 때와는 달리 고맙게 느껴진다.
직장 생활 퇴직해서 좋은 것은 평일에 놀러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주말은 직장 다니는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우리는 평일에 움직인다.
매주 화요일은 남편과 함께 서울의 조선 왕릉들을 탐방도 하고 같이 밥도 먹는다 (참고로 지금까지 간 왕릉 중에 동구릉에 있는 목릉이 가장 아름다웠다. 안 가보셨다면 가보기를 추천한다.) 부부라도 각자 스케줄이 다른 만큼 이렇게 미리 하루를 딱 정해 놓지 않으면 함께 시간을 하기가 어렵다.
이때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손목 닥터앱’이 쏠쏠한 행복을 준다. 8000보 걸으면 200원씩 주는데 우리 두 사람이 걸으면 하루 400원이다. 이것을 모아서 일정 금액이 되면 밥을 사 먹을 수 있다. 돈은 미미하지만 이것으로 함께 점심 먹는 행복감은 결코 미미하지만은 않다. 가끔은 경주나 제주도로 평일에 같이 여행을 다녀올 때도 있다. 젊을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젊은 시절을 돌이켜보면 맞벌이하느라, 자식들 키우고 공부시키느라 정신없이 보낸 시간들이었다. 부부로서의 시간을 아름답게 보내기에는 우리는 그 소중함의 가치를 몰랐고, 설익은 젊은 두 자아가 서로 자기가 옳다고 고집부리고, 충돌하며 보내느라 아주 화기애애한 부부는 아니었다. 차라리 남처럼 보냈다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은퇴를 했고, 자식들은 모두 우리의 품을 떠나 그들만의 삶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떠나간 자식들을 너무 그리워하거나, 너무 신경 쓴다면 그들에게도 부담이 될 것 같아 전화 한번 하기도 조심스럽다. 자식들은 이미 떠나간 연인이나 마찬가지다. 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어색하다.
그 대신 우리 아니면 일상 생활하기 힘드신 나이 드신 어머니를 챙기고, 부부끼리 잘 지낼 시점이 지금이 아닌가 한다. 30여 년을 때로는 ‘남의 편’ 혹은 ‘남’으로 치부하고 살았던 남편을 좋은 친구, 혹은 좋은 데이트 상대로 삼고 살아야겠다. 남편이 비로소 ‘남이 아닌 님이 되는 순간, 친구가 되는 순간’이 인생 3장이 아닌가 한다.
가끔 이런 얘기를 듣는다. “우리 부모님은 평생 일만 하다가 돌아가셨어요. 불쌍한 우리 부모님”하고 자식들이 안타까워한다. 일은 물론 돈도 주고 사회적 명예도 준다. 그러나 일만 하다가 아쉬움을 안고 인생을 마감하기는 싫다.
인생 4장, 겨울이 되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때가 곧 다가온다. 지금이 인생을 즐길 마지막 찬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