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최근에 흰 손(白手) 부부가 되었다. 연금으로 생활하는 단맛은 일 안 해도 기본 생활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30여 년 힘써 일해서 얻게 된 과실이다. 연금은 마르지 않는 우물물과 같이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연금의 맛은 항상 단맛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금은 상여금이 없고 매달 딱 정해진 금액 이상은 안 들어오게 되니 살짝 마음이 쫄 릴 때도 있다. (예상치 못하게 경조사가 많이 발생하든가 세금을 내는 달에는 좀 그렇다) 또한 열심히 일 한 뒤에 받는 급여에는 시원한 성취감 같은 것이 있다. 나는 이 돈을 쓸 자격이 있다는 생각에 나를 위한 보상으로 쏘쿨하게 쓸 수 있다. 연금에는 그런 맛은 없다.
우리는 얼마의 돈이 필요한가? 이번 기회에 생각해 본다. 아무리 부자라도 동전이 없어서 쩔쩔맬 때가 있다. 몇십억짜리 집에 살아도 몇백만 원 생활비가 없어서 힘들어하는 하우스 푸어도 많다. 내 친구 한 명은 비록 집은 없지만 일해서 따박따박 월급이 들어오니 매달 생활비에는 아무 지장 없이 잘 산다. 결국 무조건 큰돈만 있는 것이 능사가 아닌 것이다.
억 단위의 거액이 있으면 그 돈은 내 돈이 아닌 것을 나는 경험으로 배웠다. 그 돈은 자식 결혼이나 집 이사 같은 공적인 일에 쓰이거나 혹은 재투자를 하게 된다. 물론 재투자하지 않고 은행에 넣어두고 노후자금으로 편하게 쓰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테크를 한다. 결과적으로는 돈이 많으면서도 돈을 쓰지 못하고 쪼달리는 삶을 산다. 억 단위의 돈을 깨서 영화를 보러 가거나 고기 사 먹으러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쓸 돈이 없긴 마찬가지가 되는 셈이다.
작은 돈, 중간 돈, 큰돈이 각각 서로 다른 용도가 있고, 그것들이 균형 있게 있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그러면 나는 돈이 얼마 있으면 행복한가? 감사하게도 우리 부부는 낡고 오래된 집이지만 살 곳이 있고,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연금은 받고 있다. 집이 있고 매월 기본 생활비가 나오는 상태에서 나는 얼마의 돈이 있으면 돈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가?
먼저 자판기를 사용할 수 있는 동전이 늘 수중에 있으면 좋겠다. 가끔은 카드도 받아주지만 아직은 대부분의 커피 자판기는 동전만 먹는다. 전철을 무료하게 기다릴 때 혹은 집에 지쳐서 돌아오는 길에 단지 몇백 원의 동전만으로도 달콤하고 따뜻한 행복을 살 수 있다.
친구를 만났을 때 한 끼 밥 값 정도는 개의치 않고 내가 먼저 편하게 낼 수 있을 정도는 현금으로 항상 있으면 좋겠다. 걱정 없이 친구와 즐겁게 같이 밥 먹고 수다를 떨 수 있는 시간을 사는데 3만 원에서 5만 원이면 족하리라. 그러나 오직 5만 원만 주머니에 있다면 마음 편하게 그 돈을 다 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5만 원의 몇 배를 더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더 가지고 있어야 마음 편하게 5만 원을 낼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그다음에 여유돈 몇백만 원에서 천만 원 정도가 통장에 있으면 좋겠다. 여유돈이 통장에 좀 있으면 안 쓰고 가지고만 있어도 마음에 여유가 생길 것 같다. 너무 큰돈은 그것으로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주므로 오히려 내 자유를 묶을 것 같다. 다른 말로 하자면 큰돈은 일하기 위한 돈, 일에 필요한 돈이다. 그러나 천만 원 이하의 돈이라면 그 돈으로 시간이 되면 언제든지 여행을 떠나거나 내가 배우고 싶은 뭔가를 배울 수 있는 힘을 가진 돈, 자유를 주는 돈이다. 그리고 그 생각만으로도 내 마음은 이미 자유롭다.
그런데 나의 친한 친구 부부 중에 월 천만 원 수익이 있는 이가 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매월 오백만 원을 기부한다는 사실이다. 자영업을 하는 까닭에 사업장 렌트비만 이백오십만 원이 들어가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지난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크리스마스 선물 비용까지 기부하는 바람에 돈이 없어서 먹고 싶은 제육볶음을 선뜻 사 먹지 못하는 것까지 봤다. 그런데도 오랜 세월 기부를 지속하는 것을 보면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행복을 경험하고 있나 보다.
그러니 ‘작은 돈, 중간 돈, 큰돈, 균형 있게 가지는 행복’도 그냥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 돈과 행복을 도식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셈이다. 물론 감히 나는 이 친구 부부처럼 살 자신은 없다.
내가 지금 바라는 수준은 돈이 너무 없어도 돈에 매이지만, 돈이 너무 많아도 돈에 눌리는 것이 인생이니만큼 너무 없지도 않고, 너무 많지도 않기를 바란다.
더불어 혹시 돈이 없는 때가 오더라도 우울하지 않게 지낼 수 있는 배짱이 있으면 좋겠다. 살아보니 돈이 없다가도 또 들어올 때도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