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36] 그렇게 될 일들에 대하여

by 홍기자 입니다

언니.

언니. 뭐하고 살아?

언니 아직도 간호사로 일해?

아니면 결혼은 했을까? 결혼하고 일은 그만 뒀을까?


안그랬으면 좋겠다.

언니 되게 간호사 잘 어울렸을거 같아.

한번도 유니폼을 입고 본업에 열심인 언니를 보진 못했지만

내가 아는 언니라면, 그런 따뜻한 언니라면

아마도 일도 잘 했지 않을까 싶어.


언니. 나는 요즘 도전하는 모든 시도에 늘 발목이 채여.

그래서 내 발목이 지난 겨울에 그렇게 동강 부러졌을까?

결국 그렇게 될 일들이었을까?


언니. 나 최근에 방송기자 경력직에 서류를 넣었다가

읽혀보지도 못하고 떨어졌어. 요즘 말로 그걸 광탈이라고 하더라.

빛의 속도로 떨어졌다는 뜻이지.


그래도 서류 정도는 통과할 줄 알았거든.

내가 여기서 울며 버틴 시간들이 그정도 길은 열어줄거라 생각했나봐.

이제서야 고백하는데, 좀 교만했어.


언니. 나는 여전히 단점 투성이인 채로 살고 있는 인간이야.

사실 서류를 쓸 때도 생각했어.

같은 값이면 나를 뽑을까?

아이도 둘이나 있고, 살집은 두둑하고, 방송 경력은 지역 라디오 1년 한게 전부인 나를

굳이 같은 값이면 젊고 똑똑한 남자 후배를 선택하려나?

하면 할 수록 나에게 마이너스가 될 소리를 꼭꼭 씹어 삼켰어.

나는 늘 하자가 있었으니까.


그래도, 마흔이 넘으면,

이런 도전도 아예 사치가 될까봐.

욕먹고, 소문날 거 감안하고도 그냥 썼어.


언니. 그래도 나 장하지?

사람들 앞에서 나서는 것도 못하고

온통 움츠러든 채고 남 눈치만 보던 내가

기자일로 11년을 버티고 있어. 물론 중간중간 탈락의 위기가 있었던 건 비밀이야.


만나면 그 비밀도 다 말해줄텐데.

어디서 뭐하고 사는지 내 선에선 도무지 알 수가 없네.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다.


언니. 인간은 보통 평생 평균 8번의 실패를 한대. 그리고 가까스로 성공 비슷한 곳에 설 수 있대.

평균이니까 사람마다 표준오차는 얼마나 또 다를까.

정말 얼마나 다를까.

나는 이미 8번을 훌쩍 넘겨버린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언니. 나는 실패가 두렵지 않다고 호기롭게 말하는 겁쟁이야.

나는 사실 실패가 두려워. 못견디게 아파.

합격발표 통보를 기다리다 지쳐 전화를 건 그 회사 인사담당자는

버석버석한 목소리로 내게

이미 오전에 다 통보 해드렸는데요, 라는 말을 사무적으로 전달해줬어.

오히려 그 덕에 눈물이 안났을까? 나를 위로하듯 말하지 않아서?


언니. 그렇게 나는 이미 훌쩍 넘어버린 평균 이상의 실패를 또 맛봤어.

남들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최종에서 떨어진 것 보단 이게 낫대.

정말 나아? 그런거야? 내가 누군지 증명할 시간을 뺏긴게 차라리 나은걸까?


그런데 아마 시간이 지나면

나은 상황이었다고 생각하겠지? 나 늘 뒤늦게 깨달았잖아.


언니. 그런 위로를 언니에게 듣고 싶은 밤이야.

언니라면, 진짜로 끝내주게 내가 원하는 말만 골라서 해줬을텐데.

언니는 지금 어디서 뭐해?

결혼은 했어? 아이는 있을까? 형부는 어떤 사람이야?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아직 그곳에 살아?

그 지역을 가면 그렇게 언니가 생각나.

여기 산다고 했는데. 여기서 이곳까지 버스타고 다닌다고 했는데.

사실 버스를 탔는지, 자취를 했었는지도 너무 가물가물해 언니.

벌써 20년이 지났잖아.


언니.

나와 이름이 똑 같은 내 언니. 내 언니같은 언니.

글을 쓰지 않으면 둑이 터질 것 같은 밤에

언니를 쓰고 싶어서 불꺼진 밤에 노트북을 켰어.


언니.

나 그래도 20년 전에 장래희망란에 기자라고 쓰고

그거 꿈 이뤄서 지금까지 살고 있어.

매일 낙종하고, 변변찮은 글을 쓰는 기자이지만.

지금 언니가 날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엄청 멋지다고 해주려나?

나는 다른사람이 아닌 언니에게 그 말이 듣고 싶어

꾸역꾸역 오늘까지 살고 있는거 같아.


언니. 언니의 후배인 나는

오늘도 실패하고 초라하게 또 하루를 살았어.

그래도, 하루를 포기하지 않았음에 내 스스로를 다독였어.

별일 아니라고 나를 내가 겨우 껴안으면서.


언니.

나를 살리고, 내가 사랑했던 언니.

살아생전 볼 수나 있을까? 언니의 동그란 눈을 또 볼 수 있을까?

이름이 같고, 같은 달에 생일인 우리가

딱 한번만 더 볼 수 있을까?


그 딱 한번의 기회가 주어지면

딱 한번만 안아서 언니를 토닥여주고 싶어.

그리고 나도 언니에게 열심히 살고 있었구나 하고 위로를 듣고 싶어.


그땐 꼭 내 명함 한장을 주고 싶어.

이름값 하며 살고 있다고, 언니와 같은 이름으로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 왔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


언니가 여전히 간호사였으면 좋겠어.

아프면 언니를 찾아가서 링겔을 살살 놔달라고 엄살이라도 부리게.


언니.

밤이 늦었어.

나도 그만 잘게.


쓰지 않으면 못견딜 밤에

언니가 생각나서 다행이야.

언니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언니가 생각나서 참 다행이야.


언니.

잘자.

우리 또, 우선은 내일을 또 살자.

살다 보면 아마 한번은 더 볼거 같은데.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잘게.


깨알같은 밤들을 그렇게 버텨왔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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