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39] 일기를 쓰다, 일기를 짓다.

by 홍기자 입니다

요즘은 일기를 다시 쓴다.

항우울제를 먹기 시작한 이래로.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나의 자뻑과는 다르게

사실 글 쓰는게 좋은지는 모르겠다.

그 이유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다보면 결국 일기라는 벽에 마주해야 했다.


요즘은 그런 후안무치한 일은 하지 않는다곤 하던데

라떼의 유년시절의 일기란 그냥 검사받기 위한, 보여주기 위한 글쓰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학교에 아침마다 내야 하는 일기에 진짜 내밀한 말을 쓰는

멍청한 아이는 전국에 단 한명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멍청하긴 했지만 당연히 내 속마음이나, 내가 진짜 느꼈던 이야기는 담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일기는 말 그대로 그날 하루의 기록이면서 나를 돌아보는 글이어야 하는데

고작 참 잘했어요를 받기 위한 요식행위였다.

어른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이 일기 검사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을 정도였다.


그런 내가 세월의 계단을 올라 무려 30여년만에 스스로 일기를 쓴다.

그것도 꾸준하게.


일기를 성인이 되서 전혀 안쓴건 아닌데

기가막히게 3일째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여전히, 누가 볼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쓰는 거짓글이었다.


이제는 일기의 형식도, 재질도 따지지 않고

그냥 투명한 메모판 하나 열고 짧으면 4줄, 길면 8~9줄 정도만 쓴다.


신세한탄글도 많고, 그냥 갑자기 나 스스로에 대해 뻐렁쳐서 씩씩하게 쓴 글도 있다.

이 모든 글이 진짜로 내 마음껏 쓰여진 글이라는 점이 나를 온전케 한다.


최근에 여성영화제에 가서 만난 엄청난 영화가 책으로도 나왔길래

영화를 복기하며 책을 읽고 있는데

사랑 받고 싶다는 그 마음을 내려놓고 진짜 나를 바라봐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나는 그냥 나라서 완전하다는 말도.


최근 후배가 내 이야기를 곰곰히 듣다가 던진 질문은

그런데 선배는요, 왜 선배가 고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배는 그냥 선배인데요.


나는 뭘 위해 누굴 위해 고쳐야 하나. 나아져야 하나. 발전해야 하나.

그러면 그 말의 전제는 나는 고장났고, 괜찮지 않으며, 도태됐다는 건데 그건 맞나.


그렇다고 여겨온 세월이 너무 길다.

내가 하자품이라 남들도 비슷하게 보이거나 아니면 너무 높게 보였다. 나는 자주 사람들이 미웠다.


이젠 조금은 편해지고 싶다.

욕심도 있고, 질투도 있고, 남 아픈거 못지나치고, 나눠주는것도 좋아하고, 열등감도 강한 나를 그냥 나는 난데요 하고 내버려두고 싶다.


나는 지금 그 여정을 걷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 길에 작은 알약 두개와, 좋아하는 사람들을 겨우 떠올리며 가본다.


약발이 조금씩 듣나 보다.

발제 타래였는데 요즘은 이곳이 투약 타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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