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으로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다
‘위잉, 위이잉, 위잉, 위잉’
내 몸이 그 기계 안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기를 10분째.
기계는 무척 크고 낯설다. 소리는 또 어찌나 큰 지, 헤드폰을 씌워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괴물의 소리가 내 고막을 사정없이 때린다. 10분 넘게 그 소리를 듣고 가만히 누워있자니, 5년 전에 귀 수술을 하고 나서 환자복을 입고 있던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1년 전에 다리 인대를 다쳐서 수술했다던, 그 사실을 무려 한 달이 지나도록 큰 딸인 나에게 숨겼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수술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 정말로 알지 못했다. 사실 남 일이었다. 지나온 시간에 나의 아빠, 나의 엄마가 얼마나 두려웠을지를 이제야 생각하게 된 나는 MRI 기계 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MRI 검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눈물을 훔치니,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랑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보면 나는 정말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의 꼴이었다. 나는 ‘복사뼈 골절’ 일 뿐이었다. 하지만 내 다리에 나사를 10개나 박아야 한다니, 그것은 내 인생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극도의 공포감이 나를 휘감아 집어삼킨 상태였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감기를 제외한 이유로 병원에 간 적이 없었다. 이틀 전 날씨 좋은 토요일이라고 신나게 강아지들과 산책을 나갔던 그 날 이전까진 말이다. 산 내리막 길에서 마치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온 다리를 뒤틀며 넘어지는 바람에 오른쪽 발목이 골절됐다. 복숭아 뼈가 부러졌다. 두 팔다리가 멀쩡하게 달린 32살 성인이 넘어져서 복숭아 뼈가 부러져 나사 10개를 박아야 하는 경우의 수가 얼마나 될 것인가? 스스로 기가 찼다. 수술 후 2주는 입원 신세를 져야 하고, 그 후에 퇴원을 하더라도 통깁스를 4주 동안 해야 했기에 출근 걱정이 가장 먼저 앞섰다. 때문에 나의 뇌는 6인실 병동에서 그날 밤에 열심히 야근을 해야 했다. 내 몸은 다음 날 수술을 위해 금식을 하며 수술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10시에 나는 드라마에서만 보던 초록색 수술실의 조명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손에는 땀이 나기 시작했고, 척추마취를 위해 오른쪽을 보고 누운 상태로 몸을 새우처럼 둥글게 말았다. 수술이 끝난 후 8시간 동안은 누워만 있어야 하기 때문에 보호자가 소변을 받아줘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내가 청춘이라면 청춘일 수 있는 32살인데 누군가가 내 소변을 받아줘야 한다니, 끔찍했다.
그렇게 나의 첫 입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내가 수술 도중 깨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눈을 떠보니 6인실 병동이었다. 8시간 동안 제발 소변이 마렵지 않기를 바랐지만, 역시 그것은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친정엄마는 결혼한 지 1년 된 다 큰 딸의 오줌을 받아서 버려주었다. 내가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엄마가 휠체어를 끌고 와서 나를 데리고 화장실 변기 앞까지 데려다주어야 했다. 내가 수술 후 이틀 동안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잠자는 일 밖에 없었다. 한쪽 다리를 다쳤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수 있나 싶었다. 수술 후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서는 휠체어를 타고 본관으로 가야 했다. 본관으로 가기 위해서는 제법 경사가 있는 언덕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야 했다. 그 언덕 옆에 있는 큰 어항에는 최소한 나보다는 자유로워 보이는 큰 금붕어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둘째 날까지 엄마의 도움을 받았다. 셋째 날부터 스스로 휠체어를 타보기로 했다. 나는 한쪽 다리를 질질 끌고 휠체어에 탔다. 아래층에 있는 언덕 옆 어항의 금붕어들을 보러 가는 것으로 나의 도전은 시작되었다. 이틀 동안 엄마의 도움을 받으면서 조금씩 연습했기에 휠체어를 타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셋째 날에 나는 휠체어에 앉아 그 어항 앞에 앉아서 1시간을 보냈다. 금붕어가 부러웠다. 내가 걸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어항 앞에 앉아서 물고기를 쳐다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것보다 훨씬 흥미로운 일이라는 것을 평생 느끼지 못했으리라.
넷째 날에는 어항 앞에서 마음을 다잡고 언덕을 올라가 보기로 했다. 약간의 경사였지만 혹시 팔에 힘이 풀려 고꾸라질 까 무서웠다. 하지만 병원 입원 신세를 진 뒤 가장 흥미로운 순간이었다. 이게 뭐라고, 이걸 성공하면 나는 퇴원 후에도 못 하는 게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 언덕길 4미터를 올라가는 동안, 사지가 멀쩡한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라는 생각을 오백만 번 정도 했다. 그 생각의 끝에 겨우 힘들게 언덕을 넘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박수라도 치면서 ‘제가 이 언덕을 혼자서 휠체어를 타고 올라왔어요!’라고 자랑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동안 여러 번 뿌듯함을 느꼈다. 세면대에 짝다리를 짚고 서서 스스로 세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자유롭게 화장실에 다녀올 때, 휠체어가 아닌 목발을 짚고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 20cm가량의 발목에 난 상처의 딱쟁이가 아물어 떨어졌을 때.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라고 생각했던 내 물음에 나는 여러 번 같은 답을 받았다.
아무렇지 않게 행하던 일들이 사실은 얼마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인지 알게 하려는 뜻이 아녔을까. 그것은 세수이기도 하고, 언덕을 올라가는 일이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하다.
내 몸을 소중하게 여겨본 적이 없던 내가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절실히 깨닫게 되는 시작이었다.
수술을 한 지 6주가 지난 지금도 내 발목 안에는 10개의 나사가 고정되어 있고, 보호대를 차고 절뚝거리며 걷고 있다. 재활치료를 하며 이제 진정한 치료를 시작하고 있다.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삶에 임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