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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민 Feb 11. 2020

무엇이 창의력인가

영화과 입시에서 크리에이티브가 뭘까? 어떤 걸 창의적이라고 하는 걸까? 입시에서 학생들은 창의적인 걸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크리에이티브해야 하는 것을, 자신의 색깔을 과장하는 것으로 생각. 뭔가 대단히 파격적인 소재, 파격적인 상황, 파격적인 행동을 크리에이티브한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입시에서의 크리에이티브는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입시는 일정한 조건. 어떤 기준 아래서의 창의성을 평가하는, '룰'이 있는 평가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not creative but perspective’ 라고 정리할 수 있다. 창의성은 관점과 기준에 따라 맞춰지는 것이며, 이것은 문제 이해와 문제 적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문제 이해가 우선이고 ---> 그다음이 다른 입시생들과 차별을 줄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아내는 것 ---> 그리고 그 전략을 그럴듯한 이야기로 완성 짓는 것. 이런 순서가 입시에서의 창의적 순서이다.


사소한 건 사소한 게 아니다. 작은 건 작은 게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순서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하는가? 누가 한 이야기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떤 예술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소한 건 사소한 게 아니다. 우리는, 그 사소한 것 때문에 슬퍼지기도, 행복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소한 건 사소한 게 아니다. 작은 건 작은 게 아니다. 나는 입시에서의 창의성이란, 첫 번째는 관점(perspective)의 문제고 두번째는 디테일(detail)의 문제라고 확신한다. 디테일이 전부다. 디테일이 창의성이다. 디테일이 곧 미장센이다. 2017년도 영화과 11월 입시 2차 문제를 떠올려보자. A, B, C 세 사람이 어떤 곳으로 함께 갔다가 C만 남겨지게 되고 나머지는 돌아온다. 일 년 뒤, C가 A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을 쓰라는 게 문제이다. 여기서 창의적으로 접근하는 건 무언가 대단한 창조적인 소재나 비약적 상황을 연출하는 게 아니다. ‘왜? 라는 질문하기 ---> 서사의 빈 공간 디테일 채우기 ---> 그럴듯한 이야기로 완성짓기’의 순서가 옳은 순서이다.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충실히 하다 보면, 내가 써야 할 창의적인 글이 나온다. 서사는 쓰는 게 아니라, 때론 발견되는 것이기 때이다.


A는 누구일까? B는 누구일까? C는 누구일까? 직업이 뭘까?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 그들은 어떻게 만났을까? 그들 각자의 일 년 전 모습이나 상황은 어떠했을까? 무엇이 필요한가? 무엇이 부족한가? 무엇이 결핍되었기에, 그들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그들은 왜 함께 떠났을까? 왜 함께 떠나야 했을까? 처음 함께 떠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진짜 목적은 뭘까? 즉. 함께 떠난 목적이 text라면, 그들이 떠날 때 가졌던 진짜 목적, sub-text는 뭘까? 그리고 이 sub-text는 더 축소적이고, 더 가깝고, 더 중요하고 더 근원적일수록 좋다. 가장 근원적이라면 역시 함께 떠나게 된 드러난 목적이 중요한 게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 즉 A와 B와 C의 관계 속에 그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서로의 관계가 중요하고 서로 얽혀있는 이야기가 중요하다. 질문을 꾸준히 하다 보면 방향이 잡힌다.


이야기, 평범한 것이 특별해지는 마법


서사의 창작은 이렇게, 끊임없는 문제 조건에 대한 비판적 '질문'이 중요한 거다. 또 하나 더 생각해보자. 앞서 말한 걸 캐릭터의 디테일 그리고 캐릭터 사이의 사건에 대한 디테일이라고 정리하자면, 또 하나 중요한 디테일이 있다. 공간에 대한 인지이다. 공간은 힘이 있다. 공간은 서사를 갖고 있다. 마장동 축산물시장 D구역 천엽도매점, 청량리588 내의 낡은 약국, 유영철이 어제까지 살던 자취방…. 공간은 곧 역사고, 인물들의 자취고, 흔적이고, 서사이다. 그러므로 작년 한예종 영화과기출에서 또하나 중요한 게 공간적 디테일이다. 우리는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여러분이 만드는 서사의 인물들도 환경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 공간은 무엇인가? 나는 궁금하다. 여러분이 창작한 그 환경과 공간이! 그렇다면 내 말은 어느 정도 증명되었다고 본다. 작년 영화과 기출을 봐도 창의적인 건 대단한 무언가를 비약적으로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끈질기게 질문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사의 빈틈. 그 디테일을 채워나가는 '빈틈 찾기'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말을 한마디 용어로 정리 가능하다. 그게 바로 미장센이다. 인물의 디테일, 공간의 디테일, 서사의 디테일, 관계의 디테일 모두 미장센이란 용어 하나로 수렴된다. 작은 게 작은 게 아니다. 사소한 게 사소한 게 아니며 별것 아닌 게 별것 아닌 게 아니다. 너의 작은 경험, 작은 관찰, 작은 고민, 작은 질문... 그 모든 게 합격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디테일이다. 그러므로 평범한 게, 절대로 평범한 게 아니다. 평범한 글을 쓰는걸 두려워 하지 마라. 평범한 글이 디테일이 갖춰지고, 너만의 경험이 채워지고 정직한 질문들이 채워지면 그게 바로 특별한 글이 되는 거다. 평범한 것이 특별해지는 마법, 그게 바로 이야기라는 세계가 가진 가장 치명적 매력 중의 하나이니까.



ps. 이야기를 쓸 때 사건을 만들려고 하면 늦다. 디테일이 없는 단편적인 캐릭터 A, B, C를 서사적으로 전진시키려고 하니 비약적 사건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거다. 핵심은A, B, C가 이미 사건을 내포하고 있다는 거다. 즉 이미 갈등과 서사가 갖춰진 인물들이 모여야 하는 거다. 이미 만나는 것만으로도 갈등과 사건을 갖춘 인물들이라면 그들의 충돌은 자연스러운 서사적 전개를 가져올 것이다. 공소시효 전 살인사건을 담당한 형사와 (그는 살인범과의 추격전에서 얼굴에 고의적 상해를 입은 적이 있다. 복수에 불타는 인물이다) 그 살인사건의 살인범이라 주장하는 어떤 번지르르한 외모의 사람. 살인에 대한 추억을 책으로 내서 출판하고 방송 출연한다 담당 형사가 TV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그리고 극의 후반부에 내가 진짜 살인범이라고 등장하는 제3의 인물. 바로 정병길 감독이 연출한 <내가 살인범이다>의 인물 관계다. 아주 좋은 예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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