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시 마케터로 살아남는 10가지 방법(2탄)

바삐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그나마 컨트롤할 수 있는 법

by 래리

지난 글에서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분하는 일', 그리고 '조직 안의 전문가를 찾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생각보다 적으면서 구체화되는 나의 원칙들은 잡히지 않았던 나의 생각들을 명확하게 그려주었다. 지난 글에서는 아래 2개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10가지 방법이라고 호기롭게 적어보았으니, 앞으로 10가지가 될 때까지 작성해보려 한다.


1. 되는 것은 되는 것이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 되는 것을 되지 않는다고 하거나, 되지 않는 것을 된다고 하는 것이 쌓일 때 우리의 힘든 과정은 시작된다.

2. 나의 문제를 먼저 고민한 사람이 우리 조직 어딘가에 있다.

- 나에겐 새로운 문제지만, 나의 옆 동료에겐 이미 해본 일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자.


3. 클라이언트의 말을 경청하되, 말 속에 있는 의도를 파악해라.

"이거 좀 임팩트 있게 해주세요."

에이전시에서 일하다 보면 하루에도 수없이 듣는 말이다. 초년생 때의 나는 고객사의 '임팩트'란 말을 듣고 밤새 디자이너와 함께 불꽃이 튀고, 오브제가 큰 여러가지 시안들을 만들어 갔다. 색감을 바꾸고, 폰트를 키우고, 효과를 덕지덕지 얹어서. 하지만 돌아온 건 "음… 이건 제가 생각한 것과 좀 다른데요"라는 피드백이었다. 그때는 '도대체 뭘 원하는 거지?'라는 답답함이 먼저였지만, 지금은 안다. 그들이 말하는 '임팩트'는 시각적 강렬함이 아니라, 상사를 설득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였다는 것을.


클라이언트도 사람이고, 그 사람 위에도 보고할 사람이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피드백에는 그들 나름의 맥락과 압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빨리 해주세요"라는 말 뒤에는 '내일 임원 보고가 있어서요'가 숨어 있고, "좀 더 세련되게요"라는 말 뒤에는 '경쟁사가 이런 걸 했더라고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모호한 피드백을 받으면 반드시 한 번 더 묻는다. "혹시 이 결과물이 쓰이는 상황을 조금 더 알 수 있을까요?" 이 한 문장이 세 번의 수정을 한 번으로 줄여줄 때가 많다. 우리의 시간은 유한하고, 수정의 루프는 무한하다. 그 루프를 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부터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다. 피드백의 표면이 아니라, 그 아래에 깔린 진짜 고민을 읽어내는 것. 이건 센스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길러야 하는 생존 기술이다.


4. 완벽한 결과물보다, 빠른 방향 확인이 먼저다.

제안서를 쓸 때, 콘텐츠를 기획할 때, 디자인 시안을 잡을 때 우리는 늘 '완성도'라는 단어에 사로잡힌다. 물론 퀄리티는 중요하다. 하지만 에이전시에서 완벽주의는 때로 독이 된다.


나도 예전에는 120%의 완성도로 제안서를 들고 갔다. 아이데이션의 단계인데도 불구하고, 나의 전략을 이야기하는 것에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 PPT 한 장 한 장에 심혈을 기울이고, 레퍼런스도 빠짐없이 정리해서 말이다. 그런데 막상 미팅에서 클라이언트가 말했다. "아, 저희가 생각한 방향은 이게 아니라…" 이 말을 듣는 순간 3일을 쏟은 제안서의 공은 5분 만에 쓸모 없어지는 헛수고가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방식을 바꿨다. 전체를 완성하기 전에, 초안 단계에서 반드시 방향을 확인한다. "이런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맞을까요?"라는 중간 확인 한 번이 야근 두 번을 막아준다. 러프하더라도 빠르게 뼈대를 보여주고, 그 뼈대 위에 살을 붙이는 것이 에이전시에서의 가장 효율적인 일하는 방법이다.


이건 단순히 효율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체력과 정신력을 어디에 쓸 것인가의 문제이다. 에이전시 마케터의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다. 잘못된 방향에 에너지를 쏟고 나면, 정작 맞는 방향에서 쓸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 70%짜리 초안을 빠르게 공유하는 용기가, 100%짜리 완성본을 뒤엎는 고통보다 훨씬 낫다. 완벽함에 대한 강박은 내려놓되, 방향에 대한 확신은 반드시 먼저 챙기자.


5. 퇴근 후의 '나'를 지키는 것도 실력이다.

에이전시에서 오래 살아남은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일을 잘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만의 '회복 탄력성'이 있다는 것이다. 나도 3~4년 차쯤에 한 번 크게 번아웃이 온 적이 있다. 매일 야근, 주말 출근, 카톡은 24시간 울리고. 몸은 출근하지만 머리는 이미 꺼져 있는 상태로 한 달을 보냈다. 그때 깨달았다. '이 속도로 일하면 몸이 망가질 수 있겠다.' 에이전시를 떠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일이 싫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회복이 되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규칙 몇 가지를 만들었다. 주에 2회 이상, 1시간 이상은 무조건 땀을 흘리는 운동을 하는 것, 일주일에 12시간 이상은 반드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점심시간만큼은 자리를 벗어나 바깥 공기를 마시는 것. 대단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작은 규칙들이 월요일 아침, 다시 소용돌이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힘을 준다.


혹자는 말한다. '에이전시는 원래 그런 거야.' 맞다. 원래 그렇다. 하지만 '원래 그런 것'에 매번 소진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클라이언트의 마케팅을 대행하는 사람이지, 우리의 건강까지 대행해 줄 사람은 없다. 오래 살아남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회복시키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


일을 계속하는 것은 선택이지만, 어떻게 계속할 것인지는 전략이다. 에이전시라는 환경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끊임없는 요청, 촉박한 데드라인, 예측 불가능한 피드백들.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를 지키면서 일하는 법을 아는 것. 그것이 에이전시 마케터가 1년이 아닌 10년을 버틸 수 있는 진짜 실력이 아닐까. 오늘도 수고한 모든 에이전시 마케터에게, 내일의 안녕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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