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을 힘들어하지 말것
처음 이 업계에 발을 들였을 때, 나는 모든 것이 열정과 체력으로 해결될 줄 알았다. 클라이언트의 모호한 요구에도 무작정 밤을 새워 결과물을 뽑아냈고, 기획과 다른 현장의 변수 앞에서는 내 부족함만 탓하며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매일이 롤러코스터 같았던 시간 속에서 어느 순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지독한 번아웃을 마주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에이전시에서 오래, 그리고 '잘'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작정 달리는 속도보다, 거센 파도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게 닻을 내려줄 나만의 '원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 글은 그 치열하고도 지난했던 7년의 시간 동안, 온몸으로 부딪히며 깨지고 체득한 나름의 생존기이자 오답 노트다. 머릿속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감각들을 하나씩 활자로 끄집어내며, 일을 되게 만들고 동시에 나를 지키는 기준들을 정리해 보았다.
아래는 지금까지 정리했던 포인트들이다.
1. 되는 것은 되는 것이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 되는 것을 되지 않는다고 하거나, 되지 않는 것을 된다고 하는 것이 쌓일 때 우리의 힘든 과정은 시작된다.
2. 나의 문제를 먼저 고민한 사람이 우리 조직 어딘가에 있다.
- 나에겐 새로운 문제지만, 나의 옆 동료에겐 이미 해본 일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자.
3. 클라이언트의 말을 경청하되, 말 속에 있는 의도를 파악해라.
- 요청 사항이 아니라 요청 사항 안에 있는 핵심을 파악해라.
4. 완벽한 결과물보다, 빠른 방향 확인이 먼저다.
- 요청하는 사람은 중간 상황을 공유하는 사람에게 신뢰가 간다.
5. 퇴근 후의 '나'를 지키는 것도 실력이다.
- 남의 일을 생각하기 전에 나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한번 더 관심을 갖자.
6. 현장의 변수는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대비하는 것이다.
에이전시 업무, 특히 오프라인 팝업 스토어나 컨퍼런스 행사 같은 캠페인을 기획하고 현장에서 뛰다 보면 '완벽한 계획'이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아무리 운영계획안을 v20까지 작성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비가 와서 야외 동선이 엉키거나, 예상치 못한 인파로 굿즈가 조기 소진되거나, 예상했던 협력업체의 문제 때문에 일정이 지연되는 등 사고는 늘 우리의 상상력 밖에서 터진다.
초년생 때는 이런 변수가 생기면 현장에서 허둥지둥 하다가 고객사도 함께 불안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변수는 애초에 완벽히 막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진짜 중요한 것은 변수를 원천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플랜 B와 플랜 C를 미리 쥐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대응력'이다.
성공적인 캠페인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무결점의 캠페인이 아니다. 무언가 삐걱거렸을 때, 광고주가 눈치채기 전에 얼마나 매끄럽게 다음 스텝으로 넘어갔느냐에 달려 있다. 현장에서는 책상 위 기획서의 정교함보다, 무전기 너머와 평정심을 잃지 않는 '문제가 생기지 않은 것처럼 유연하게 대연하는 척'이 중요하다. 문제는 해결할 수 있으면 문제가 아니다.
7. 진짜 레퍼런스는 모니터 화면 밖, 일상 속에 숨어 있다.
새로운 제안서를 써야 하거나 뾰족한 기획이 필요할 때, 습관적으로 핀터레스트를 키거나, AI 툴에게 물어본다. '000 브랜드의 기획서를 이렇게 써줘." 물론 안전한 참고 자료다. 하지만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움직이고는 '진짜 아이디어'는 내 책상 위 모니터가 아니라 일상적인 경험에서 튀어나올 때가 훨씬 많다.
마치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대학교 캠퍼스의 축제나 온라인 이벤트를 오프라인 마케팅에 접목해 보거나, 내가 푹 빠져 있는 진격의 거인 속 서사와 세계관을 오프라인 공간 기획에 슬쩍 녹여내는 식이다.
사실 오프라인에서의 경험이 노다지인 경우가 으레 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은 곳을 기피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곳의 동선과 시선이 멈추는 곳을 관찰하고, 내가 소비하는 콘텐츠에서 사람들이 열광하는 포인트를 훔쳐낸다. 남들이 이미 모니터 안에 정리해 둔 것을 쫓기보다, 밖에서 직접 느끼고 경험한 파편들을 나의 일로 연결 짓는 촉. 이 촉을 날카롭게 세우는 것이 뻔한 기획과 팔리는 기획을 가르는 한 끗 차이가 된다.
8. '감(Feeling)'보다 강한 것은 '왜(Why)'라는 기록이다.
에이전시에서 7년쯤 구르다 보면, 웬만한 클라이언트의 요청이나 챌린지에는 "아, 이거 이렇게 풀면 되겠네" 하는 감이 생긴다. 흔히 말하는 데꼬보꼬. 하지만 이 직관을 클라이언트나 유관 부서 동료에게 설득할 때는 철저히 논리와 기록으로 포장할 줄 알아야 한다.
"요즘 감튀 모임이 유행이니, 감튀 모임을 해보죠"라는 제안은 "쌀 넣고 밥을 지으면 쌀이 나오는데 남이 하는 걸 보니 맛있어 보이니 우리도 똑같이 해보죠"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 이 방향이어야만 하는지, 그리고 우리 브랜드는 그 이벤트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 포인트와 논거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결과물(What)을 포트폴리오로 남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결정을 내렸던 이유(Why)와 과정에서 발생했던 오답 노트를 기록한다. 화려한 디자인의 제안서보다, 과거의 실패와 성공에서 축적된 꼼꼼한 기록 한 줄이 중요한 미팅 테이블에서 판을 뒤집는 가장 날카롭고 단단한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경험은 휘발되지만, 기록된 논리는 자산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