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스페인
그녀 없이 그라나다 시내를 돌아다닌 증거를 찾아 일목요연하게 사진을 보냈다. 어제 함께 걸어 다녔던 GRIN VIA DE COLON 대로와 누에바 광장을 비롯해 그날의 핵심 포인트 알람브라 궁전 사진들까지. 그녀와 그녀의 남자 친구는 어제 헤어지면서 내게 말했다.
“네가 그라나다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려줘”
낯 선 여행지에서는 거듭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행 버스를 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엉덩이 차가운 대합실에서 세 시간을 넘게 기다려 버스를 탈 시간이 되었다. 안내원에게 물으니 저 버스를 타면 된다고 했다. 옳다구나 하면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뒤에 섰다, 버스에는 그라나다행이란 표시가 있었다. 이윽고 짐을 싣는 시간, 아저씨에게 표를 보여주며 그라나다행 맞지? 하고 물었다. 습관적으로 물어본 것이었는데, 아저씨가 말씀하시길 넌 저 옆에 하얀 버스를 타야 한다고 했다. 화들짝 놀라 짐을 꺼내 옆으로 갔더니 거기도 그라나다라고 써져 있었다. 무슨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버스가 최고급 버스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버스는 검은색이었다.
내 좌석번호는 8번,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 새침했던 그녀가 있었다. ‘오늘도 옆 아가씨는 새침하군.’ 혼자 생각했다. 한 시간 반 후, 휴게소에 들렀다가 다시 출발할 때 그녀가 내 안전벨트를 잘 못 매지 않았다면 우린 서로 웃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고, 말없이 그라나다에 내렸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녀의 미소를 본 김에 용기를 내어 그라나다에 대해 물었다. 내가 찾아가야 할 곳이 그라나다 역을 기준으로 안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저것 질문하고 대답하는 사이 상당히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고, 그라나다엔 메트로가 없으며 기차역은 하나라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대강 도시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고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밤에 낯 선 도시에 혼자 내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내심 불안했는데, 5번 버스를 타면 내가 가는 목적지에 내릴 수 있다는 말도 해주었다.
“너는 어디로 가니?”
“나도 네가 가는 방향과 멀지 않은 곳에 가, 원한다면 내가 네 숙소까지 가는 걸 도와줄게”
“정말, 그래도 되니? 정말 고맙다”
보통의 경우라면 대강의 위치를 알고 나서 혼자 찾아가면 된다. 버스 번호도 가르쳐줬고, 대합실엔 분명 안내소도 있다고 했다. 만약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택시를 타도된다. 그러나 어렵게 말 건넨 사람이 낯 선 도시에서 날 도와주겠다고 했고,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는 일, 정말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하는 사이 그라나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녀가 말했다.
“ 저기 내 남자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
“어머나 정말이니?”
“걱정 마, 내가 너에 대해 이야기해놨고, 같이 네 숙소에 데려다 줄 거야.”
뭐라고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요구하지 않았는데 받는 자발적인 도움이나 친절은 지금까지 기억하기로 몇 되지 않는다. 내 가방들을 번쩍 받아 들고 택시를 탔다. 아가씨와 나는 5번 버스를 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남자 친구는 택시 편이 더 쉽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나는 내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어쩔 줄을 몰랐다. 결국 택시비도 그들이 냈다. 호텔에 내리며 내일 혹시라도 시간이 괜찮으면 얼굴 한 번 보자고 했다.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서 식사라도 대접하는 게 도리인 것 같았다. 그랬는데 흔쾌히 호텔로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11시, 나는 아침도 굶고 그들을 기다렸다. 아는 사람 없는 도시에서 사람을 기다릴 때의 기분이란,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호텔에서 내려다보면 큰 도로가 보이고, 그 도로는 가운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대로의 형태를 띤다. 그 중간 도로 가장자리로 양쪽 차선이 있는, 멀리서 볼 때 굉장히 걸어보고 싶도록 만드는 도로였다.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삼 심 여분 일찍 내려가 그 도로를 걸으며 사진을 찍고 놀았다. 마음에 드는 길이었다. 오가는 사람들 중엔 노인들도 꽤 많았다, 그런 만큼 양 옆의 차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선 어디까지나 자동차보다 사람들이 주인이었다. 자동차들은 속도를 줄였고,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나 때론 무단 횡단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서 있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호텔 앞에 다정하게 서 있는 그들을 발견했다. 어찌나 반갑던지. 그녀 이름은 깔루따이다. 물론 남자 친구 이름도 알려줬지만 너무 발음하기 어려워서 그냥 ‘네 남자 친구’란 이름으로 불렀다. 셋은 걸어 다니며 알바이신 지구 쪽으로 향했다. 내가 관심 있어 체크 해 놨던 곳을 희한하게 그들이 날 데리고 갔다. 알바이신 골목골목을 누비며 멀리 반대편에 알람브라 궁전이 보이는 곳까지 올랐다. 누에바 광장, 대성당을 지나 골목 안 시장과 시내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 출출하면 맥주 한 잔, 추우면 커피 한 잔.
일행이 있을 때 좋은 점은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혼자서 멋진 파라솔 아래 앉아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며 음식을 맛보는 일은, 여행 동안 하고 싶었지만 생각만큼 자주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소심하다. 특히 음식을 먹는 데 있어 소심하기도 하고 무관심하고 또 멋이 없기도 하다. 어느 도시에 가면 어떤 음식을 꼭 맛보고, 어디를 반드시 찾아가는 식의 여행을 잘 하지 않는다. 물론 좋은 점이 있고 불편한 점이 있지만, 나는 내 식을 취하는 대신 불편함도 감수해왔다. 미각이 그다지 발달하지도 않았고, 후각에 문제가 있어서 냄새 또한 민감하게 맡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에 무심한가 보다 하고 받아들이는 편이다. 그러나 이 날, 셋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어느 바에 들어가 맥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또 길을 나서기를 여러 번 했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다니다가 한 잔 하고 또 다니다가 또 한 잔 하고 또 이런 과정의 반복이라 했다. 맥주 한 잔을 시키면 그라나다에선 타파스가 따라 나온다. 세 잔을 시키면 타파스 세 개가 나오는데, 이는 적당히 안주가 되기도 하고 요기가 되기도 한다. 같은 가게에서 거듭 잔을 시키면 그때마다 종류가 다른 타파스를 내 온다. 재밌고 귀여운 사람들, 아니 이런 멋진 문화가 있단 말인가. 마드리드에선 볼 수 없는 그라나다의 고유한 음주문화인 듯했다.
날은 흐리고 이슬비가 간혹 내렸다. 바람도 세게 불었다. 그래도 나를 위해서 그랬는지 이들은 곳곳을 걸어 다니며 소개해 주었다. 고마운 사람들, 빈속에 맥주 서너 잔을 마신 나는 말은 하지 않아도 어지간히 취한 상태였다. 취객으로 둔갑하지 않기 위해 꽤나 노력했는데, 그게 어쩌면 깔루따와 더 친밀해진 동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표시 내지 않기 위해 때때로 그녀의 팔짱을 낄 수밖에 없었다는 것.
짧게 스치며 지나친 인연도 오래 마음에 남는데, 이들은 어쩐지 남 같이 여겨지지 않는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낯 선 도시에서 말없이 도움을 주었고 꼬박 하루를 붙어 다녔던 사람들, 알바이신 골목을 걸어내려오면서 둘이 꼭 한국에 여행 오라고 했다.
“알았어, 그렇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야.”
“결혼식 하고 신혼여행을 아시아로 오지 그래?”
“정말 그러고 싶어. 그러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 거야.”
“결혼식은 검소하게 하고, 어서어서 돈도 모으고 휴가를 저축하면 되지 않겠어?”
“알았어 그럴게.”
“한국 올 때 꼭 연락하는 거 알지?”
“알았어 반드시 그럴게.”
“온 김에 중국이랑 일본 같은 곳도 가보고”
“알았어, 아직 스페인 사람들이 한국은 많이 모르는 것 같아.”
“그러게, 한국 사람들은 스페인 많이 오는데, 어딜 가도 한국말이 없더라고, 그게 아쉽긴 하더라. 아 참, 하나 딱 발견했는데, 마드리드 산미겔 시장에 가니까 한국말로 ‘만지지 마세요’라고 쓰여있더라 하하하하.”
물론 다음날 알람브라 궁전에 가서 한국말로 오디오 가이드를 빌릴 수 있었고, 알바이신 지구에서 내려와 그라나다 대성당에서도 한국말로 된 오디오 가이드를 빌렸지만, 우리가 신나게 떠들며 걸어 다녔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이 있기 전이었다. 마지막 한 잔을 하고 있을 때 밖엔 비가 제법 내렸다. 남자 친구는 준비해 온 우산을 나와 여자 친구에게 주었다. 둘이 가라고, 나는 택시 타고 가겠다고 했지만 굳이 호텔까지 바래다주었다.
돌아와 함께 보낸 하루 동안 찍은 두 사람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좋아했다. 그런 거라도 내가 해 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주말 남자 친구를 만나고 다음날 마드리드로 돌아간 그녀는 알함브라 사진을 보면서 잘 했다고 해주었다.
론다에 도착해서 나는 그녀에게 짧은 안부를 보냈다. 메시지로 안부를 휙 날리며 물어도 그다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 정말 오랜만이었다. 세비야에서 바르셀로나를 향해 가는 길, 기차를 타고 가며 찍은 사진도 그녀에게 보냈다. 안개가 가득하고 올리브가 가득한 들판이 그녀에겐 이미 익숙할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내가 멋진 여행을 하는 것을 자신의 일인 양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