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모들은 왜 그랬을까?

학생 그 너머

by 알버트

대학원에서 가족복지 강의를 할 때였다. 특정 상담접근법을 다룰 때였는데,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부모는 자녀에게 최선의 것'을 주려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방치하고 학대하는 것을 어떻게 부모가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에는 사회복지사 또는 복지기관에 장기간 근무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직무상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클라이언트들을 만나는 빈도가 높았다. 그리고 결핍된 환경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을 지원하는 일이 주요 업무여서 그랬는지, 직무 수행에서 심한 스트레스와 갈등,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고 소진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이들은 지원 아동들의 부모에 대해 분노를 느끼거나 복잡한 감정을 지닌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그 학생이 아니어도 그건 누구든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나 역시 처음 그 문장에서 떠올렸던 질문이었고,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며,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던 가정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최선’은 우리 혹은 아이의 입장에서 최선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그 환경에 처한 부모의 입장에서의 최선이라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했다. 만약 어려움에 처한 가정의 그 부모가 올바른 양육 방법을 배웠다면, 자녀들을 방치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을 초래하는지 알았다면, 부모가 보이는 자상한 태도가 자식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았다면, 또는 다른 대안이 있었다면 그 부모는 자녀들에게 혹은 가족에게 현재와 다르게 행동했을 수 있다는 것. 만약 자녀들을 공평하게 대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줄 깨닫고 있었다면,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소득이 있었다면, 자신의 말이 자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있었다면, 그랬다면 부모는 현재와는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 그 부모들 역시 유년을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므로 성장사 속에서 배운 대로‘부모가 생각한 최선의 것을 주려했다는 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는 의미임을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부모를 이해하기 때문에 부모가 아이에게 저지른 어떠한 부적절한 행동과 태도가 수용되거나 용서되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부모들에 대해 그 행동의 이유를 이해하란 뜻이 절대로 아니다. 이러한 가정은, 피해자인 아이가 있을 때 또는 도움이 필요한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를 지원하기 위해 이미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그 아이의 부모에 대한 이해를 가정한다는 것이다. 아이를 돕기 위해, 아이의 치료를 위한 시작으로서, 부모 역시 측은한 면을 가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여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을 납득하는 일이 쉬운 시작은 아니지만, 어떤 입장에 처해있든 상대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조금 더 쉽게 해결하도록 해준다.


푸른 나무 재단(구 청소년 폭력 예방재단)에서 의뢰받은 강의가 있던 날이었다. 강의 대상은 수강명령을 받은 위기청소년의 부모들이었다. 강의 준비를 할 겸 시작 시간이 되기 전에 문을 여니 부모님 몇 분이 계셨다. “안녕하세요!”인사하며 들어섰지만 나를 바라보는 표정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게 느껴졌다. 흘깃 쳐다보시고선 고개를 돌리시는 분을 비롯해 체념한 듯 무표정하게 앉아계시는 분, 화 난 표정을 짓고 계시는 분, 적개심에 찬 눈으로 돌아보시는 분 등.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걸어 들어가는 등 뒤로 무감각하고도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도 잘못을 저지른 자녀의 부모로서 그 자리에 앉아있지만,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벅찼을지도 모르겠다.


세 시간의 강의가 끝난 뒤, 교육 담당자가 와서 물었다. “선생님, 어떻게 하신 거예요? 마지막 시간에는 문 열고 들여다보고 싶은 걸 겨우 참았어요. 부모님들 표정들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강의가 끝난 뒤 참가하셨던 한 아버님은 평소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셨다. 연세 드신 한 분은 강의를 들으며 연신 수첩에 무언가를 적으셨다.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는데 너무 큰 것을 얻었다는 분도 계셨고, 부모인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던 분도 계셨다. 그런 황홀한 상황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진정 행복한 일이었다.


그 부모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기에 이 자리에 왔을 수 있겠구나. 자신이 쓰는 어떤 말 어떤 행동이 자녀에게 독이 되고 득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좋은 부모가 되는 방법을 배웠더라면 지금에 와서 저토록 후회하는 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구나’. 물론 그들이 어떤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해서 반드시 그대로 행동했으리라는 확신은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알고 있었다면 최소한, 행동을 선택할 기회는 있었을 것이다. 점심 식사 후 찻집에서 만난 한 부모님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기뻤다. 그분들의 말이나 웃음, 밝은 표정에도 기분 좋았지만, 무엇보다 기뻤던 이유는‘적어도 오늘부터는 과거와는 다른 눈으로 자녀를 보리라’ 생각하는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한 술 밥에 배부르진 않다. 한 걸음 한 걸음 걷고, 실패해도 다시 걷기 시작한다면 적어도 어제보다는 다른 곳에 서 있게 된다. 부모의 태도는 자신을 비롯해 자녀와의 관계, 가족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다. 부모 중 한 명이 변화하더라도 부부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자녀와의 관계, 더 넓은 인간관계로 변화는 확장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 시작될 수 있고, 그렇더라도 이 작은 변화는 점차 중요하고 큰 변화로 이어지도록 하는 힘이 있다. 마치 잔잔한 웅덩이에 던진 돌 때문에 파문이 번져가듯이 그렇게 퍼진다. 물론 이때는 멈추지 않고, 실패해도 다시 시작한다는 전제 하에서 그렇다. 그 부모들이 그날부터 당장 그런 변화를 만들어 내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의 문제점을 알았고,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작은 변화를 위해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지 알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중요했다. 강의가 끝나기 전, 새롭게 시도한다고 해서 한 번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혹시 실패하더라도 그건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포기하지 말고 다시 또다시 시작하시라고 말씀드렸다. 한 번 해보다가 ‘에이~ 안되는구먼’하면서 그만두지 말고 다시 시작하고 또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사람이 생각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자신이 믿고 있던 것을 의심하면서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옳다고 믿어왔던 것을 내려놓고 다른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 한 번의 강의를 듣고 그 부모들이 모두 내가 바라는 변화를 일으키는 데 성공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중 단 한 분만 나아져도 나의 강의는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낫고, 그분마저 실패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가족이 몇 번은 성공의 경험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좋은 시도는 여러 번 실패하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걷는다 해도 앞에 놓인 돌부리와 웅덩이 때문에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 걸음도 걷지 않는 자는, 그것을 예견하면서도 거기까지 걸어간 시간과 경험을 가질 수 없다. 적어도 그 앞까지 성공한 기회를 결코 가질 수 없다. 그리고 걷다 보면 돌부리를 건너고, 거대하게 펼쳐지는 문제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건너뛸 만한 웅덩이라는 사실도 깨달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


교사들이 학생들의 부모까지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교사로서 학부모의 입장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아이들의 부모를 이해하는데 시간을 할애할 수는 있다. 학부모를 이해함으로써 교사는 학급 아이들을 보다 잘 도울 수 있고, 학생들과 건강하고 의미 있는 일 년을 보낼 수 있다. 변화는 진행형이다. 아이들의 학부모도 한 때는 어린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자라 오늘의 부모가 되었다. 그들은 미숙했던 어제를 지나 오늘에 이르러 배우고 내일 더 부모다워질 것이다. 부모도 자녀와 같이 성장한다. 교사가 해마다 아이들을 통해 깨닫고 배워 변모하듯 부모 또한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 교사로서 우리는 내 아이들의 부모 또한 나와 아이들과 함께 커간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한 낮에는 제법 따스하다. 산수유의 뒤를 따라 양지쪽 매화가 피어난다. 지난 가을 마당에 여기저기 꽂아둔 마늘이 겨울 추위를 뚫고 나왔다. 신기할 따름이다.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