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청의 다음 계절

전략기획 팀장 일기 시즌 2 - 1편

by 초연

아침 여섯 시 반, 회사 채팅 알림이 먼저 눈을 뜨게 했다.

눈을 뜨기 전부터 머릿속엔 그래프가 먼저 켜져 있었다. 환율, 수주, CAPEX, 그리고 어제 회의에서 회장님이 툭 던지고 간 한마디.


“내년은… 진짜 한 번 점프해야지.”


점프.

누군가에게는 가벼운 동사지만, 전략기획팀장에게는 숫자, 시나리오, 사람, 조직, 운까지 다 끌어와야만 겨우 한 칸 움직일 수 있는 단어였다.


휴대폰 화면을 켰더니, 새벽 한 시에 올라온 해외법인 보고 메일이 맨 위에 있었다.

제목은 항상 비슷하다.

“긴급 보고”, “현안 공유”, “Tax authority meeting result”.


나는 그 메일을 열어보지도 않은 채, 잠깐 화면을 끄고 이불속에 다시 누웠다.

보고서를 보기 전에, 오늘 하루를 버틸 마음가짐을 먼저 정리해야 했다.

나는 전략이 아니라, 나 자신부터 브리핑해야 하는 사람이라서.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영업본부장이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팀장님, 올해 목표 다시 한번 조정해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웃으며 물었다.


“위로? 아래로?”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위로죠. 회장님 말씀이… ‘경기 안 좋다 소리 너무 많이 들리는데, 그래도 우리 정도면 기회 아닌가’라고…”


나는 대답 대신 엘리베이터 천장을 올려다봤다.

위로? 아래로? 요즘 내 삶의 모든 질문이 그 둘 사이에 걸려 있었다.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자, 스프레드시트가 연달아 열렸다.

매출, 이익, 환율, 법인별 CAPEX, CB 발행 시나리오, 그리고 베트남 법인의 VAT 리스크.


칸 하나에 숫자를 바꾸면, 시트 다섯 개가 연쇄적으로 흔들렸다.

그래프는 마치 심전도처럼 출렁였다.


‘이 회사 안의 기상청’이라는 별명은 어느새 공식 호칭이 됐다.


환율이 50원만 흔들려도,

유가가 10달러만 올라가도,

관세나 세법이 한 줄만 바뀌어도,


나는 그 변화를 제일 먼저 모델에 넣어 봐야 한다.

내일의 실적, 내후년의 부채비율, 다다음 해의 설비투자 여력이 어떻게 뒤틀리는지 먼저 봐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기상청을 지키는 사람의 마음은, 어느 계절에 머물러 있는지.


점심을 겨우 때우고, 오후 투자심의 바로 전.

회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잠깐 올라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회장님은 창가에 서 있었다.

도시와 공장지대 사이의 경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베트남 건은, 최악으로 보면 얼마까지 보냐고 물어봤지?”


나는 아침에 시뮬레이션해 둔 숫자를 떠올렸다.


“현시점 기준 최악 시나리오는, 〇〇억 수준입니다. 물론 그전에 협상·조정 여지는 있고—”


그가 내 말을 끊었다.


“나는 두 가지가 제일 싫어.

하나는 ‘몰랐습니다’고 하는 거고,

또 하나는 ‘설마 그렇게까지 되겠습니까’ 하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미리 최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자네가 우리 기상청이지. 비 올 거면 그냥 비 온다고 말해줘. 다만… 사람들이 우산 들고나갈 수 있게 시간은 좀 줘야 하고.”


복도를 걸어 내려오며 문득 생각했다.


‘비가 온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작 비를 피할 수 있을까?’


내가 그려 넣은 최악의 숫자들은 회사의 방패가 되겠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구조조정, 투자 축소, 연봉 동결이라는 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칼끝은 언젠가 나를 향할지도 모른다.


퇴근 후, 집에 와서 노트북을 다시 켰다.

낮에는 회사의 미래를 계산했고, 밤에는 나의 오늘을 기록하려고.


파일 이름은 이렇게 적었다.


“전략기획팀장 일기 시즌2 – 1편: 기상청의 다음 계절”


나는 오늘의 회장실 대화, 엘리베이터에서의 농담, 그래프 위에서 흔들리는 숫자들, 그리고 그 숫자들 사이에 끼어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주 짧게 적었다.


“오늘 나는 또다시 최악을 상상했다. 내 일이기 때문에.

하지만 내 삶의 최악은 언제 한 번 정리해 봤더라.”


저장 버튼을 누르고 노트북을 덮었다.

내일 아침, 나는 다시 회사 안의 기상청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날씨가 어떻든 나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예보를 나 자신에게 먼저 내려주고 싶었다.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