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뒤에 숨어 있는 얼굴들

전략기획 팀장 일기 시즌 2 - 2편

by 초연

아침 회의에서였다.

재경팀장이 환율 가정 치를 올해보다 5% 더 보수적으로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회의실은 잠깐 조용해졌다.


“갑자기 왜 그렇게 낮춰요?”

“시장 예상치가 계속 바뀌고 있고… 혹시 모르니까요.”


혹시 모른다.

전략기획팀장이라면 하루에도 스무 번 듣는 말이다.

모르기 때문에 예측해야 하고, 예측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의심해야 한다.


나는 노트북을 넘겨받아 새로 제시된 환율 가정 치를 입력해 봤다.

숫자가 바뀌는 순간, 매출과 이익, 법인별 실적 전망치가 줄줄이 흔들렸다.

옆자리에서 누군가 낮게 탄식했다.


“팀장님, 이거 나오면 영업본부 난리 납니다…”

“알아. 그래서 이 숫자를 그냥 ‘결과’로 내진 않을 거야.”


나는 스프레드시트를 다시 잡고,

영업팀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과 현실적 리스크 사이의 중간값을 찾기 시작했다.

전략이라는 이름의 대부분은 거창한 선택이 아니라,

이런 ‘중간의 기술’로 이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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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끝난 뒤,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다.


“팀장님, 혹시 이번 분기 구조조정 가능성에 대한 시나리오… 준비돼 있나요?”


나는 잠시 말을 아꼈다.

예전 같으면 단칼에 대답했을 것이다.


“아닙니다. 아직은 그 단계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지금, ‘아직’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얄팍한 방어막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베트남 VAT 리스크가 현실화되면,

그리고 CB 프로그램이 생각보다 늦어지면,

우리가 세워둔 인력 계획은 거의 확실히 뒤틀릴 것이다.


“… 시나리오는 준비해두고 있어요. 다만 절대 밖으로 언급되면 안 됩니다.”

“아, 네… 팀장님도 힘드시죠?”


힘들다.

하지만 전략기획팀장은 힘들다는 말을 어디에도 둘 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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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직전, 재무본부에서 한 팀원이 내 자리로 와서 말했다.


“팀장님, 혹시 시간 좀 괜찮으세요?

저… 요즘 계속 불안해서요.”


나는 노트북을 덮어놓고, 그에게 의자를 하나 내줬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조용히 말했다.


“혹시… 회사 진짜 많이 위험한가요?”

“… 왜 그렇게 생각했어?”

“요즘 팀장님 얼굴이… 항상 안 좋아 보여서요.”


나는 잠시 말없이 책상 위의 커피잔을 바라봤다.

진짜 위험해서가 아니라,

나는 늘 ‘최악’을 먼저 준비해야 하는 직업이라서 그런 것뿐인데.


“아냐. 회사는 괜찮아. 다만 내 일이 항상 불확실성을 먼저 보니까 그래.

너희까지 불안해하면 안 되잖아.”


그는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커피잔을 들어 올렸지만,

식어버려 뜨겁지도 않은 커피가 이상하게 쓰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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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해외법인과 화상회의가 잡혀 있었다.

베트남 법인장, 회계팀장, 현지 로펌 관계자가 동시에 들어왔다.


“Tax office 쪽에서 추가 서류를 요구했습니다.

기존보다 더 상세한 버전이고—”


“기존에 제출한 자료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인가요?”


“… 아마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나는 그 말만 듣고도 알았다.

그들이 이유를 말하지 않는 것은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유가 너무 많아서였다.


회의가 끝난 뒤, 나는 스프레드시트를 다시 열었다.

최악 시나리오 옆에 또 다른 칸을 하나 더 만들었다.


‘최악보다 조금 더 나쁜 경우’


전략기획팀장의 노트에는 항상 최악이 두 개 있다.

사람들은 그중 하나만 알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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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무렵, 개발 팀장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은 어땠어?

얼굴 많이 피곤해 보이던데…”


나는 잠시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일이 힘들었던 이유는

수치 때문이 아니라

그 수치 뒤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은… 숫자가 아니라 마음이 좀 무거웠어.”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하나 더 보냈다.


“그래도 너한테 말하니까 조금 가벼워진다.”


휴대폰 화면을 끄고 창문을 바라봤다.

바깥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고,

사무실 불빛 사이로 팀원들의 그림자가 길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일이면 또 다른 숫자가 바뀔 것이고,

또 다른 변수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전략기획팀장의 일기는 결국 숫자의 기록이 아니라

숫자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의 기록이라는 걸.


그리고 내 마음은 오늘, 숫자보다 사람 때문에 더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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