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기획 팀장 일기 시즌 2 - 5편
퇴근 전이었다.
불이 거의 꺼진 사무실에서 재무팀 김 대리가 내 자리에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팀장님… 잠깐 괜찮으세요?”
“왜? 무슨 일 있어?”
“아… 그게… 판단 좀 부탁드리려고요.”
‘판단’이라는 단어는 하루에도 수십 번 들었지만,
하루가 끝나갈 때 들으면 유독 더 무겁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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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리가 들고 온 자료는
단순한 비용 승인 건처럼 보였지만
나는 이미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런 건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는 걸.
“팀장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거 거절되면 실무자들 업무가 두 배로 늘어나고…
근데 승인하면 예산 상 크게 애매한 부분이 있어요.”
즉,
승인해도 문제, 거절해도 문제라는 뜻이다.
나는 프린트를 한 장 넘기며 물었다.
“너 생각은 어때?”
“저는… 팀장님 판단에 따르겠습니다.”
그 대답이 가장 곤란하다.
판단을 부탁하러 온 사람이
실은 판단을 회피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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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자에 기대앉아 서류를 한 장, 또 한 장 읽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김 대리, 너도 알지?
우리가 판단을 내릴 때 기준은 두 개야.
회사 기준이 하나,
그리고 사람 기준이 하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기준으로 보면 이거 승인하면 안 맞아.
근데 실무자들 기준으로 보면
이거 거절하는 순간 오늘 밤 야근 확정이고…
내일 일정도 다 밀리고.”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제가 판단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
전략기획팀장이 매일 마주하는 딜레마가 바로 이거다.
정답은 두 개고,
둘 다 틀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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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히 펜을 들었다.
“내 판단은… 승인이다.
단, 사유를 이렇게 남긴다.”
나는 텍스트 박스에 이렇게 적었다.
“단기적 운영 효율을 우선함.
단, 예산 영향 및 프로세스 개선 필요.
추후 동일 사안 반복 시 구조적 보완 필요.”
김 대리는 놀란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팀장님, 괜찮으시겠어요?
위에서 뭐라고 할 수도 있는데…”
나는 웃었다.
“위에서 뭐라고 하면
내가 설명하면 돼.
하지만 실무자들은 설명할 기회가 없잖아.”
그 말에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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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가고 난 뒤,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 시계를 봤다.
밤 9시 40분.
나는 노트북을 덮고,
일기 파일을 열었다.
“오늘 나는 회사를 선택하지도,
사람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그 둘 사이의 균열을 잠시 메웠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하나 더 남겼다.
“전략기획팀장에게 가장 큰 피로는
일을 많이 하는 게 아니라
매일 ‘옳음’과 ‘맞음’ 사이에서
판단을 강요받는 데서 온다.”
저장 버튼을 누르자,
노트북 화면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불 꺼진 사무실에 남은 건
나와, 오늘 하루 동안 쌓여버린 ‘판단의 피로’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