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 니트

by 효섭
먼저 우지를 냄비의 한 면에 넓게 바른다.
그 위에 얇게 썬 쇠고기 그리고 고기 위에 설탕을 뿌린다.
고기에 단맛이 배어들면 간장과 술을 곁들인다.
관동 지방에서는 미리 만들어 둔 장국에 건더기를 끓이지만, 내가 로망을 느끼는 건 관서풍이다.
건더기 재료는 파, 구운 두부, 얇게 썬 곤약, 표고버섯, 팽이버섯.
얇게 썬 곤약은 칼슘이 고기를 딱딱하게 하므로 떨어뜨려 놓는다.
고기 60도, 파 70도, 두부 90도, 곤약 60도, 표고버섯 50도, 팽이버섯 30도가 바람직하다.

기묘한 이야기 2009년 가을 특별편 - 이상적인 스키야키 중"



나는 나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 운동을 가겠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집에 들어올 때는 쓰레기봉투를 사야 한다고 메모해놨지만 까먹을 확률이 높다. 친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비꼬는 버릇은 주변의 사려 깊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이런 일련의 일들을 연속적으로 벌여놓고서도 잠에 들 땐 나쁘진 않은 날이었다며 스스로를 속여넘길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내가 벌일 수 있는 악행들을 나열해보려는 건 아니다. 그러려면 리스트를 만들어야 할 텐데 그건 꽤나 심각한 종이 낭비다. 방금도 스스로를 환경 보호론자처럼 보이게 하는 속임수를 저질렀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스스로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지니는, 내 취향에 대한 불신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상적인 니트를 찾고 있다. 정확히는 라운드넥 니트 티라고 해야겠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니트로 부르려 한다. 이상적인 니트는 부드러워야 한다. 입었을 때 뒷목이 간지러워져서 견딜 수가 없다면, 그 니트는 불구덩이에 던져야 한다. 그렇다고 캐시미어처럼 가벼운 것도 곤란하다. 오히려 적당히 묵직한 편이 좋다. 목 부분은 단단히 마감돼 있지만 때론 칫솔을 물고 있을 때도 통과할 수 있을만큼 신축성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꽈배기 무늬 같은 기교를 바라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촘촘하게 짜여 있지만 어떤 기교도 없는 단순한 니트를 선호한다.


이상적인 니트를 찾는 일은 꽤나 오랫동안 성과가 없다. 옷가게에 들를 때면 언제나 옷들을 스치고 지나다니며 니트를 찾아 헤매지만, 늘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곤 한다. 습관적으로 니트를 찾는 일은 벌써 5년째에 접어들었다. 그러다 옷장에 있는, 이상적인 니트에서 꼭 한 가지씩은 빠져있는 옷들을 보면서 고민했다. 왜 하필이면 이상적인 니트지?


사실 나는 내가 정말로 이상적인 니트를 찾고 싶어 하는지 확신이 없다. 아마 이 취향의 근본은 니트보다는 옷차림에 그런 고집이 하나쯤 있는 사람에 대한 동경일 가능성이 크다. 주변의 훌륭한 위로 전문가들은 취향이란 게 원래 처음에는 다 그런 식으로 출발한다고 말한다. 거기엔 단계가 있다고.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이유에 의해 빠져들어서, 점점 나름의 체계를 쌓아가고, 마침내는 완고한 취향이 된다며 말이다. 하지만 위로라는 것에 원체 약한 나는 스스로에게도 일관된 관점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꼭, 산통을 깬단 말이다. 취향이 지닌 출생의 비밀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를 불신한다. 신화적으로 포장해보려 애써도 감춰지지 않는 그 비밀 아닌 비밀은, 이미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녹아들었다고 착각한 취향의 세계 건너편에서 나를 보며 조소한다. 조금이라도 달라 보이고 싶었던, 어느 영화나 책에서 눈여겨봤던, 그럴듯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소재라 믿었던,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었거나 혹은 쓸데없이 천진해 보이고 싶었던 그런 초라한 순간들이 이제는 꽤 그럴듯한 취향으로 보일 수도 있을텐데. 마치 성공하고 돌아와 고향에서 행세깨나 하려는 사람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듯 들이닥친다. 아니! 너 개똥이 아니냐!


이런 기습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저 꾸준히, 뒤통수를 내줄 수밖에. 다행히도 내게 순수함에 대한 취향은 없다. 그렇다고 내 자신의 취향을 의심하는 게 위악적인 태도로 이어질 필요도 없다. 나는 여전히 이상적인 니트를 찾는다.


나는 감동을 느끼는 순간에 내가 감상적이고 섬세한 사람인 체하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한다. 좌절하거나 분노하는 순간엔 내가 어쩌면 그런 극적인 연출을 선호하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솟는다. 자신만이 알고 있을,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운 생각들은 거추장스러운 과거처럼 발목을 붙잡는다. 최근에 산 니트는 목이 갑갑한 편이다. 이상적인 니트는 못 찾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불신을 의식하며 말해야 한다. 나는 이상적인 니트를 찾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글은 계간 문화비평잡지 비문 4호에 실린 글입니다.)